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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붉은 유령의 생애

운사(云史) 2024. 9. 2. 02:25


칼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초년의 삶은 1814년 빈 회의 이후 나타난 왕정복고의 시대였다. 나폴레옹의 지배에 저항한 독일의 해방전쟁은 불과 몇 년 전이였고. 오스트리아의 수상인 메테르니히의 주재 아래 유럽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군주제라는 혁명 이전의 체제로 재편되었다.



1830년 파리에서의 7월 혁명 이후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힘과 1848년 2월혁명 이후 노동운동 및 결사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요구가 중요해졌던 격동기였기에 이러한 체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으로 증폭되었다.



언론인이자 정치가이고 또 철학자인, 그리고 정치경제학 비판가인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그 몇 년 전에 유대교에서 개신교로 전향한 명망 있는 변호사의 아들로 트리어의 항소법정에서 태어났다.
마르크스는 유대계였고 외조부는 네덜란드의 랍비(유대교 율법학자)였고 친가 또한 그랬다.



마르크스의 아버지,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자유주의자이자 계몽주의자로 빈체제의 격동기에 고전자유주의를 설파하며 활발히 운동을 이어갔다.


그랬기에 마르크스의 집은 그가 다니던 중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적 정신이 지배했다.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하루는 아버지의 친구가 자유주의 성향의 선생을 고용한것이 드러나 대대로 물갈이가 된 것을 보았는데 그만큼 자유주의의 열풍은 거셌고 아버지에게 직간접적이라도 마르크스는 영향을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학시험(1835)을 본 이후에 그는 철학을 희망했지만 아버지의 만류로 본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그곳은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이 많은 곳이였고 논쟁이나 토론에 참가하는 등 동아리 활동에 치중해 성적이 떨어지며 그의 아버지가 베를린으로 집어넣게 되었다.

한편 그해에 원래 알고 지내던 예니와 사랑에 빠지고 7년 후에 결혼한다. 여담으로 마르크스의 장인은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를 좋아했는데, 이 장인에 의해 프랑스의 초기 사회주의자인 생시몽을 신뢰하며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베를린에서 학업을 계속해 가는데, 베를린에서는 이미 5년 전에 죽은 헤겔이 대학의 정신적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브루노 바우어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가 속한 청년 헤겔파 집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헤겔변증법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비판을 이론적 혁명의 잠재성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몇 년 후에 그는 이론적 혁명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그는 혁명적 실천도 요구했는데, 이 실천의 학문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정치경제학 비판, 즉 경제적 관계만이 아니라 이 관계의 이론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이때 그는 자기의 표현에 따르면 "머리로 서 있는 헤겔의 사변적 관념론을 (유물론적인) 발로 서도록 만든다. 우리는 이에 따라 모든 현실이 물질, 즉 질료의 특성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서술했다.





주변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가장 심오한 철학적 진지함을 가장 날카로운 재치"와 결합하는 마르크스는 1841년 정치적 이유로 베를린에서가 아니라 예나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의 제목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이였고 후에  「역사법학파 철학선언」도 썼다. 대학을 졸업하고 마르크스는 학자가 되고 싶었으나 이미 자유주의,헤겔주의를 프로이센 정부가 탄압했기에 힘들었다. 그래서 1841년 이래로 자유주의적 계열의 『라인 신문』의 일원으로 이후에는 수석 편집인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경제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1843년 이후 파리에서 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노동운동 조직체와 접촉하며, 아르놀트 루게와 함께 『독불연보』를 편찬한다. 여기서 그는 자주 인용되는 말을 한다.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계의 심정이며, 정신성을 상실한 상태에 놓인 정신이다."

이 말은 좀 더 유명한말로 발전한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나중에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정부의 사주에 의해 결국 파리에서 쫓겨나 브뤼셀로 갔는데 그곳에서 프랑스 사회주의, 즉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을 연구한다. 그는 그곳에서 『경제학-철학 수고』(1844)를 집필해 1932년에야 출간했다. 이 책은 훗날 루카치와 마르쿠제 같은 비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강한 인상을 주게 된다.

마르크스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 준 공장주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그는 『신성가족, 혹은 비판적 비판의 비판』(1845)을 저술했다. 그들은 이 작품에서 공동으로 포이어바흐의 헤겔 비판에 따르면서도 여전히 사변철학에 머물 가능성을 추구한다. 함께 저술했지만 엥겔스가 편찬한 『독일 이데올로기』(1845, 1932년에야 출간)가 곧이어 등장했다. 여기서 그들은 베를린에서 친분을 쌓았던 지도적인 청년 헤겔주의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수행하는데, 포이어바흐와 바우어, 그리고 막스 슈티르너 등이 그들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 연맹의 요청으로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1848)을 집필하는데, 엥겔스가 조금 수정한다. 이 두 저자는 유럽의 여러 나라를 덮친 1848년 시민혁명의 파고가 현존하는 사회관계의 프롤레타리아트적 전복으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발전시켰다.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 즉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비밀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 동맹을 맺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국가를 장악하기 전까지는 그 자신이 민족적이다.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사슬 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들의 『선언』은 아직 정치적 효력이 없었지만 나중에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정당의 강령의 초석이 되었다.
마르크스의 문장력은 당시 불만에 쌓여 터무니없는 이상을 꿈꾸던 이들에게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공산당 선언의 표지





그사이 정치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인 혁명가가 된 마르크스는 브뤼셀에서도 추방되어 파리를 거쳐 쾰른으로 갔다. 여기서 당국은 프로이센 국적을 상실한 그에게 다시 시민권을 주려고 하지 않았으며, 대신 평화와 질서를 해치는 외국인으로 간주해 추방했다. 파리에서 또다시 추방된 그는 런던으로 건너갔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이제 홀로 『정치경제학 비판』(1859)을 쓰기 시작하며, 무엇보다 세 권으로 이뤄진 주저인 자본을 동일한 제목인 "정치경제학 비판"을 부제로 달고 쓰기 시작했다. 제2권과 제3권은 엥겔스가 후기를 추가해 나중에 출간한다.




그의 학문작업과 더불어 정치적 성공이 따라오는데, 이때 정치적 성공이란 높은 공직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진영에서 인정을 해주었다는 의미이다.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 정점에 이르는데, 이때 그는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과 더불어 지도적이지만 경쟁적인 공동작업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년간 침묵을 강요받게 된다. 실제로 부분적으로 엥겔스와 공동으로 작업한 포괄적인 그의 사회이론과 경제이론은 1864년 런던에서 결성되어 1872년 뉴욕에 본부를 두게 된 국제노동자연합(IAA, '제1인터내셔널')을 지배한다. 이때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여타의 사회주의 이론을 압도하며 지도적 이론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때 경쟁적 이론에는 공상적 사회주의, 급진부르주아 공화주의, 우익노동조합주의, 프루동의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라살레의 국가사회주의, 바쿠닌의 무정부주의 등이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1917년 10월혁명 이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은 이른바 마르크스주의라는 교조주의적인 형태로,점차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게 된다.

반면 사회복지적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던 밀의 자유주의는 대안으로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비슷하게 마르크스주의도 선전용으로 그려질 뿐 받아들여지지 않고 레닌주의와 같은 국가 사회주의,더 나아가 북한같은 그냥 독재국가에 악용되었다.



이후 1882년 12월 2일,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몇 주 후에 그의 딸 예니도 사망한다. 이러한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마르크스는 두 달 후인 1883년 3월 14일에 죽게 된다. 이때 엥겔스는 장례식에서 마르크스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임노동계급을 근대 자본주의의 생산체계로부터 해방하려는 투쟁이 그의 참된 소명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활동적인 전사는 없었다."



공산주의는 비록 실패했고 수많은 모순을 낳았다.
그러나 그 모순으로부터 우리는 교훈을 배울 수 있었고 자본주의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충분했다.그것은 오직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세상을 해석했을 뿐이며, 요점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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