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파리 하계올림픽에서 국대선수들이 양궁,펜싱,사격 등 무기 3종목에서 큰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만큼 과거 한국인들의 궁술,민족성 등을 다룬 고문헌들을 언급하며 한국인들의 유구한 특징을 조명되고 있다.
그렇기에 적게나마 한국인의 특징,기질 등을 언급한 고문헌의 기록에 따라 주제를 다뤄 볼 것이다.
발해 사람 셋이 모이면 범 한마리를 당해낸다.
<거란국지>
이 말은 후세에 각색된 말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발해 사람들이 강인하고 용감한 기풍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 뿐만 아닌 다른 중국 측 문헌들을 살펴보면,
부여에 대해서는 <삼국지>, <후한서>, <진서> 등이 모두 "그 백성들이 강인하고 용감하다(其人强勇)"라고 적고 있다.
고대 한민족과 유사한 문화에 영향을 받은 읍루에 대해서는 <삼국지>에서는 "사람들이 용감하고 힘센 경우가 많다(人多勇力)", <후한서>에서 "무리는 비록 적지만 용감하고 힘센 이가 많다(衆雖少而多勇力)"라고 적고 있다.
또 한 동옥저에 대해서는 <삼국지>, <후한서>에서 "강인하고 용감하다(强勇)"라고 적고 있고
마한에 대해서는 <삼국지>에서 "성질이 강인하고 용감하다(性强勇)", · <후한서>에서는 "그 사람들이 씩씩하고 용감하다(其人 壯勇)", <진서>에서는 "성질이 용감하다(性勇)' "라고 각각 적고 있다.
그에 반면 동예의 경우 그 성격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약 9미터 되는 긴 창을 여러 사람이 함께 들고 덤비는 광경을 떠올려 보면 그 용감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서로 비슷한 언어,문화,풍속이 같다보니 한민족에 대해서 한결같이 강인하고 용감함을 서술한 것을 보면 고조선 또한 다르지 않은 고유한 기질이였을 수 있다.
그래서 그런건지 <진서>에서는 마한의 풍속이 "서로 굽히고 복종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貴相屈服)"라고 적고 있다.
거기다가 '본래 누구에게든 좀처럼 굽히고 복종하는 일이 없어서 누구든지 일단 상대가 굽히고 복종하기만 하면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더라도 금방 풀어버리기 마련이었다'라고 하고 청년들이 성인식을 치룰 때 등가죽을 밧줄로 꿰어 쟁기를 끌었다는 특이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과장도 있을것이지만 아마 인내력이 엄청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외세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끊임없이 싸운 저항의 역사를 만드는데에도 큰 일조를 했다.
또 고구려인은 "걸음걸이가 하나같이 달리는 것 같다(行步皆走)"라는 말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걸음이 언제나 뛰어오르듯 날렵해서 조금도 늘어지는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현대 한국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을 보아 오랜 전통의 흔적인 셈이다.
강인성과 용맹성이 이미 고대부터 한민족의 기질으로 자리 잡았던 것처럼 신중하고 순박해서 좀 어리숙하기는 해도 남을 속이는 일은 없고 어설프기는 해도 가식적으로 꾸미는 일은 없었다고 하는데
"말로 약속을 하고 바깥에 놓아두어도 서로 탐내지 않는다" 라는 <진서> <숙신전>의 기록이 그 증거이고,
"낙랑조선은 범금이 여덟 항목뿐이지만 대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無門戶之閉, 而人不為盜.)[<한서>, <삼국지>] 라고 한 것이 그 증거이다.
진한에서는 "길을 가다가 서로 마주 치면 다들 멈추어 서서 길을 양보한다(住立而讓)"[<삼국지>]라고 했으며
남녀가 유별함에 대해서는 동예와 진한을 따로 거론하면서 "읍루의 여자는 과부가 되면 평생토록 개가하지 않는다(寡居終身不嫁)"[<한원(翰苑)>에서 인용한 <숙신국기(肅憤慨記)>의 내용]라고 적고 있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혼인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쪽으로 거행했는데 남자 집에서는 돼지와 술을 보낼 뿐 재물로 맞아들이는 법은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혹시라도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다들 그것을 부끄러워하며 계집 종을 파는 짓으로 여겼다.
(有婚嫁, 取男女相悅, 即爲之 男家送猪酒而 已,無財聘之禮, 或有受財者, 人共恥之, 以爲賣婢)<북사(北史)>
라고 했으니 조금도 구차한 구석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나라의 성품 자체부터가 남의 힘에 기대는 것을 꺼려 "적이 있으면 제가가 자발 적으로 싸웠다"라고 할 정도로 책임감이 강하기도 했지만 군사가 있더라도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남에게 기대는 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금나라 태조(太祖)가 목종(穆宗) 을 수행하여 숙합리(肅哈里)와 전쟁을 벌일 때 발해유수(渤海留守)가 갑옷을 주려 하자 그것을 거절하면서
"그 갑옷을 입고 싸움에서 이긴다면 그것 때문에 이긴 꼴이 될 것이다."(被彼甲而戰, 戰勝則是因彼成功也,]<금사>
라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힘만으로 공을 세우려 했던 일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 역사가들은 읍루나 고구려 사람들이 "약탈"과 "도적질 "을 즐긴다고 적기도 했으나, 그런 기록들은 국경을 넘어 중국을 공격한 일을 폄하한 표현들일뿐 당시 아무리 잔인하고 난폭한 행동을 했다 해도 그것은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다.
고대 한국인의 효와 상례를 통해서도 성품을 알수 있다.
원래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지는 몰라도 유교에서 볼 법한 충효는 중국보다 훨씬 이전부터 보편화되어 있었다.
공자가 '동이의 후예인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이 거상의 예법을 잘 지켜 부모 사후에 삼일상을 치르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석 달 동안 조금도 마음가짐이 흐트러지지 않고 애도를 그치지 않고 상례를 치루는 삼 년 내내 애도의 마음을 잃지 않은 일'을 높이 사 칭찬한 대목도 그 예시이다. *<공자가어>(제10권)<곡례자하문>에서 언급된 내용*
그리고 다음의 기록들은 부여인의 상례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
"부여의 풍속으로는 다섯 달 동안 상례를 치르는데 오래 치를수록 영광스럽게 여긴다. 망자에 대한 제사는 우리에게 생소한 것도 있고 익숙한 것도 있다. 상주는 서두르려 하지 않지만 남들이 이를 강요하여 늘 쟁의를 통하여 이로써 절제한다. 상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남녀가 모두 순백색의 옷을 입으며 부녀자들은 얼굴을 덮는 옷을 입고 장식들을 치우는데 대체로 중국과 흡사하다.
(其俗停喪五月, 以久爲榮 其祭亡者, 有生有熟. 喪主不欲速而他人强之 , 常諍引以此爲節. 其居喪, ,男 女皆純白, 婦人着布面衣, , 去環珮, 大體與中國相仿佛也.)[<위략>]
"부여에서는 상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남녀가 혼사를 치르지 않았다."
(夫餘,其居喪日, 男女不婚娶.)[<통전>]
이밖에도 <후주서(後周書)>이르기를 고구려에서는 삼 년 동안 부모상을 치렀고 <수서(隋書)>36)에서는 백제의 상례가 고구려와 일치한다고 한 것 등으로 보아 부여,고구려,백제가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던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고대 한국인들은 효를 중시하는 문화가 전반에 널려있었고 이는 타고난 성격이라 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의 성격은 예로부터 가무의 형태로 회자되어 오기도 했다.
하나라(夏)때에 무악(舞樂)을 보낸 일이 <죽서(竹書)>37)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주례(周禮)>38)<천관(天官)>에서 동이의 음악['말악(靺樂)"]을 가르치는 특별과목['말사(靺師)"]이 있었던 것을 보면 고조선의 무악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외국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굳이 이런 사례까지 들지 않더라도 한국계 국가에 공통된 노래가 발달한 자취를 찾아볼 수 있기에,
이 같은 공통점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삼국지에 이르길 부여인들은 길을 가다가도 주야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하루 종일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고 고구려에서도 가무를 즐겨 서 도읍이고 부락이고 가리지 않고 밤만 되면 남녀가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서로 노래를 부르며 사랑을 속삭였다고 한다.
예(濊)의 오락은 대체로 부여와 같았다고 하고 <문헌통고>,
"마한의 춤은 수십명이 전부 일어나 서로 뒤따르면서 땅을 박차고 몸을 숙이면 손발이 서로 호응하며..." [삼국지], 진한에서도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외국인이 전하는 사실이 각자 대체로 일치하는 것을 보면 흥의 민족인 우리의 음악,춤이 이미 고대에 멀리까지 전해진 것을 암시한다.
이처럼 한국인의 특징은 위와 같이 용맹하고 강인하며 걸음걸이가 빠르고 효를 중시하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자료가 더 있겠지만 여기서 그만 다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