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가야의 역사에 관하여 3편
(아라가야의 제철기술과 농공구 및 무기류)
이번 편에서는 아라가야의 뛰어난 철기생산 및 제조기술과 철제 농기구와 공구,다양한 무기류를 다뤄보고자 한다.
{아라가야의 철기류,제철제강술}
아라가야의 철기제작 기술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였다.게다가 예로부터 철이 많이나는 변한지역에 위치해있어 철의 생산량 또한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철을 변한시기 해외에 수출했을 정도이며 이를통해 철기가공술의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제철기술을 전수받고 발전시키기에도 충분했다.풍부한 철 생산량은 제철제강술과 철 가공술을 성장시키는데 큰 작용을 했고 그덕에 아라가야는 영토에 비해 수많은 철기와 발전된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뛰어난 철기의 제작과 많은 생산량으로 인한 보급은 농기구,무기,갑옷,마구등 다양한 산업 전반에 이용되며 아라가야의 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농기구}
철기의 발전은 가장 먼저 농업에 영향을 끼쳤다.튼튼하고 청동보다 제조하기 쉽고 채굴도 쉬운 철은 아라가야의 비옥한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농기구는 4세기대부터 제대로 완비되기 시작했으며 아라가야에서 출토된 농기구를 통해 왕권의 신장과 농업의 발전을 볼 수 있고 당시 벼농사가 대다수 인구의 주 생업이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고 인구가 늘어 향후 국력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농기구는 호미,낫,보습,삽,살포,쟁기,따비(일종의 원시적인 쟁기) 등이 주로 출토되었다.
1.호미
호미는 손으로 땅을 일구는 개간용 농기구로 가장 이른 시기의 호미는 창원 다호리 무덤에서 출토된 호미이다.
창원 대평리 유적에도 호미가 출토되었고 따비와 삽도 일부 출토되었다.하지만 시기가 이른 만큼 아라가야의 철기라 볼수는 없다만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함안에서는 4세기에 들어서부터 호미가 출토되었다.
2.보습
보습은 소나 말등의 가축에 메우는 쟁기밑에 다는 삽같은 것으로 땅을 일구는 개간 및 경작용 농기구였다.진주 옥봉 7호무덤에서 쇠보습이 출토되었으며 이러한 쇠보습을 가지고 논을 갈거나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소를 사용했으며 쟁기에 사용된 보습이였는가'라는 문제는 삼국사기 등에 짫은 기록이 전부이고 신라와 가야지역에 종종 출토되지만 신라는 기록상 지증왕 이후만 인정되고 가야는 쟁기에 사용된 보습이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3.낫
낫은 농기구로 만들어졌지만 후에 전투무기로 활용되었다.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부장품으로 4세기 이후부터 출토된다.
그러나 대부분 농업생산에만 쓰인게 아니라 권위를 과시하는 의례용 부장품이나 적을 베는 무기로도 사용된 것으로도 보인다. 왜냐하면 단조품으로 만들어진 낫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단조와 주조를 비교하자면 단조는 만들기 어려운 대신 정교하고 품질이 좋고 주조는 품질은 떨어지는 대신 생산이 쉽고 빠르다는 것이 차이이다.이 관점으로 보면 단조품 낫은 손상이 필연적으로 많이 가해지는 다른용도로 활용되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또 보통 농기구를 권력자의 부장품으로 묻지는 않을테니 농기구보단 무기였을것이다.물론 일반 평민들은 무기보단 농기구로 썼을것이지만 무기로 썼을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예시는 말이산 고분군이므로 권력자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보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질 좋게 만든 의례용 부장품이거나 무기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5.살포
살포는 논에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에 사용하는 농기구로서 네모꼴의 몸통에 가늘고 긴 굽통이 평행하게 연결된 농기구로 합천 옥전 M3호무덤에서 쇠자루가 달린 채로 발견되었다.
6.쟁기
쟁기는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예가 없으나 쟁기의 부품인 보습이 발견된것을 보아 아라가야에서도 소가 끄는 쟁기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7.따비와 삽,가래
따비는 원시적인 형태의 쟁기로 사람이 직접 밭을 가는 삽처럼 이용했으나 이후에 소가 쓰는 쟁기로 발전하며 자취를 감췄으나 따비가 출토되었다는 것은 쟁기가 후에 발전했음을 암시하기에 귀중한 유물이다.삽 또한 흙을 퍼나르기 위한 도구로 따비와 비슷하게 혼용되서 사용됐고 가래또한 흙을 파는데 쓰인 도구로 생긴 형태에 따라 넙가래 등으로 불리지만 둘다 크게 비슷한 도구로 밭갈이,건축,개간 등에 유용하게 쓸 수 있다.
{공구}
공구는 나무를 베거나 무기를 제작하거나 도구을 제작할 때 필연적으로 필요했던 산업도구로 그 가치가 유용했다.
아라가야의 공구로는 도끼,자귀,끌 등이 출토되었다.
1.도끼
도끼는 공구들중 가장 많이 출토되고 다방면으로 쓰이던 도구였다.도끼 역시 무기로도 쓰였는데 이또한 단조품으로 말이산 고분군에서 출토 되었기 떄문이다.가장 오래된 것은 창원 다호리 유적의 자루있는 쇠도끼이고 나무를 베는 개간용 도끼였을 것이다.
도끼는 자루에 머리를 어떻게 끼우는지에 다르다.
크게 주머니식도끼머리와 구멍식도끼머리가 있다.
구멍식은 현재 우리가 흔히 쓰는 류인 반면에 주머니식은 자루를 끼울 주머니를 도끼머리 윗부분에 연결해 더 견고한것이 특징이다.주로 주머니식도끼가 출토되는것으로 보아 튼튼하고 견고한 도끼인 이 형태가 가장많이 제작된 것 같다.
진주 옥봉 무덤,창원(도계동무덤떼,대평리유적,오림동무덤떼,마산 현동유적),합천 옥전 일부 무덤 등에 출토되었고 특히 현동 유적에서 배를 만들 때 최적화된 도구인 어깨가 넓은 쇠도끼(유건철부) 수십점이 무더기로 나오는 것도 적지 않았다. 주조품과 단조품이 다양한것으로 보아 제철제강술 등 금속가공의 규모가 크고 질이 아주 좋았다는 것을 말해준다.쇠도끼는 공구이기도 하지만 강력한 무기로도 쓰였다.
보병들이 주로 메고 다니는 전투용 도끼를 쓰는 군사들을 도끼병(부월수)으로 따로 나눌 정도였고 의장용으로도 쓰였을 것 이다.
또 부장품으로 출토된 것을 보아 쇠도끼를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도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자귀
자귀도 일부 출토되었는데 자귀는 나무의 가지를 치거나 나무를 매끄럽게 다듬는 공구이다.벌채를 하는 용도보단 나무를 다듬어 목공도구를 제작하는 용도인 만큼 화살대나 농공구 및 무기류에 자루를 제작하는데 중요했을것이다.
3.끌
끌은 나무에 구멍을 내거나 홈을 내는 도구로 나무자루에 껴서 썼다.현재는 쇠끌 밖에 없지만 긴 자루를 사용하기만 하면 창이나 다름이 없어 적을 찌르는 무기로 쓰였을 수 있다.창원 도계현무덤떼,합천 옥전 M3호 무덤에 일부 출토되었고 창원 현동에서 100개의 끌이 대량출토 되었다.
4.손칼
손칼은 우리가 시중에 접하는 커터칼이나 작은 칼과같은 것처럼 그당시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쓰엿던 작을 칼이다.크기는 현재의 작은칼과 같은 크기부터 20cm되는 크기까지 있고 호신용으로도 사용될수 있어 무기로도 가능했다.실샐활에 잡다하게 쓰여서 홈을 파내거나 다듬는 공구로도 쓰였고 나무목간에 새기던 글자가 오타일 경우 긁어내서 다시적는 용도도 가능했다.작은 손칼은 옥전 M3호 무덤에서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출토된 다양한 공구로는 못뽑이,가위,못,꺾쇠,창대패 등이 있다.그러나 자료가 빈약하여 그 존재만 확인할 뿐이다.
{단야구}
아라가야는 철을 생산하고 제작했던 만큼 쇠를 주조하고 철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철제도구들이 사용되었을 것이다.그것이 농기구,무기,공구를 만드는데 쓰이던 단야구로 쇠집게와 망치,숫돌,모루등이 있고 송풍장치 등도 있다.
1.집게,망치,숫돌
가장 대표적인 단야구인 집게와 망치,숫돌은 우선 출토 지역부터 확인해 보자면
집게는 함안 회산리 , 의령 예둔리 46호분, 합천 옥전 채집 · M3호분, 합천 창리 B-26호분, 합천 저포 E지구 5-1호분 등에서,
망치는 함안 회산리, 의령 예둔리 46호분, 창원 성산패총. 창원 진북 대평리, 합천 옥전, 합천 저포 E지구 5-1호분
숫돌은 합천 옥전 M3호분에서 그존재가 확인되었다.
모루는 창원 현동현에서 출토가 확인되었고 함안과 합천, 창원, 등지에서 집게와 망치, 숫돌 등이 소수나마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철기 제작 과정에서 사용되기에 기능상 세트를 이루어 사용된다.
그러므로 철기 제작 시 가열 된 철소재를 집는데 쓰는 집게, 이를 두드리는데 쓰는 망치, 두드려서 만든 큰칼이나 낫,도끼 등과 같은 철기의 날을 갈아서 세우는 데 쓰는 숫돌 등 철기 제작이라는 일련의 공정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되는 도구인 것이다.
따라서 위의 3종 단야구의 존재는 아직 철생산 유적이 발견되지 않더라도 해당 지역에서 철기제작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또한 창원 현동에서 철찌꺼기와 덩이쇠가 발견되었다.
{무기류}
무기는 칼과 활,창과 낫,도끼 등이 있었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적을 공격하여 정복활동을 하는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무기는 크게 보병용과 기병용으로 나뉘며 가야의 철제 기술과 군사력을 확인하는데에 중요한 지표이다.
1.칼
칼은 중요한 무기였으며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형태를 잡고 망치로 두들고 밀도를 조절하고 담금질을 하며 만들고 자루를 끼워서 사용한 무기로 다른 무기에 비해 철이 많이 소모되고 날 또한 길었다.칼자루엔 신분의 지위와 재산정도에 따라 여러 장식을 했는데 앞서 사진자료에서 보다싶이 화려한 장식을 하고 금,은,금동 등으로 도색한 반면 검소한 칼자루도 있었다.
칼을 구분하는 것은 자루의 형태와 장식으로 보고 판단했다.형태는 칼자루가 둥근 원두대도와 둥근고리가 있는 고리자루칼(환두대도)로 나뉘고 아라가야에선 대부분 고리자루칼을 사용한다.고리자루칼의 장식은 고리안에 아무런 장식도 없는 민고리자루칼,장식이 있는칼로 나뉘어 지는데 장식은 공예기술에서 언급했다시피 하나의 봉황이 있는 단봉무늬고리자루칼이나 하나의 용이 있는 단룡무늬고리자루칼,용과봉황이 같이 있는 용봉고리자루칼 등이 있다.이밖에 소환두,은장환두,상감환두 등이 더 존재한다.
고리자루 칼은 원래 고구려가 사용했는데 손에서 떨어지지 않게 고리에 손과 끈을 묶어 연결해 떨어지지 않게 사용되기 위해서 시작되었고 이후에 차츰 고리안에 장식을 한것이다.이것이 남쪽으로 전파되어 신라,백제등에도 사용되었고 아라가야 또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칼은 공들여 만든 세공품에 가까워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데에 안성맞춤이였을것이다.창원과 합천에 민무늬고리자루칼도 적지않게 출토되는것으로 보아 실전용으로도 쓰인점도 없지않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고리자루큰칼은 가야인들의 철 조련 기술과 공예기법,조형 감각을 동시에 엿볼 수 있어 예술적,기술적으로 가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2.활
원거리 무기인 활과 화살은 기본무기 중에 하나였다.활은 활채와 활시위로 이루어져 있고 전부 활채는 나무,뼈 등으로 만들어지고 활시위 역시 짐승의 힘줄을 썼기 때문에 전해지는 유물이 극히 적다..
아라가야지역의 가장 오래된 유물은 창원 다호리 유적의 서기전 1세기에 만들어진 보병용화살통이다.
또다른 유물로는 함안고분군에 사슴뿔로 만든 활이 전부인데 기병들이 썼던 기병용활으로 만궁으로 보인다.
활은 보병용과 기병용으로 나뉜다.
보병용 활은 완만한 곡선의 큰 활이고 활시위와 화살도 길었다.대표적으로 창원 다호리유적의 화살통이 긴 90cm의 화살통이므로 대략 화살이 1m는 넘었을 것이다.
기병용 활은 활시위가 짧고 구부리는 정도가 강한 만궁으로 굽은 활을 반대쪽으로 강하게 굽어서 탄력이 매우 센 활이였다.화살은 70cm가량으로 활과 마찬가지로 짧았다.
3.활촉
화살의 머리부분에 끼우는 금속으로 형태에 따라 용도가 다르고 살상력도 판이했다.주로 철제금속으로 생산되었고 쇠활촉은 소모품이지만 많은 양이 발굴되었다.
합천 옥전고분군에선 400여점이 발굴되었으며 기본적으로 쇠활촉이지만 소리를 내는 뼈로 만든 활촉도 있었다.
창원 현동 유적에서도 100여점이 출토 되었고 창원 도계동19호무덤에서는 독사모양 활촉, 끌모양 활촉,외날칼 모양 활촉 등 4가지 형태를 하나씩 갖춘 화살촉 24개가 세 겹으로 쌓여 있는 것이 나왔다.
이것은 가야에서의 쇠활촉 생산이 용도에 따라 규격화되여 있었음을 보여준다.쇠활촉의 길이는 각자 다르지만 큰 것은 14cm 정도로 비교적 길다.
이것은 아라가야에서 용도와 살상력 등을 가늠하여 여러 가지 활촉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화살통
화살통도 보병용과 기병용에 따라 길이가 서로 다르다. 그것은 화살의 길이가 다른 데로부터 오는 차이이다. 보병용 화살통은 어깨부터 허리까지 잔등에 지는 식으로 달았다면 기병용 화살통은 승마에 편리하게 허리에 차게 되여 있다.
보병용 화살통은 창원 다호리 유적-말이산고분군 4호분,
기병용 화살통으로는 합천 옥전고분군(M1,M3)에서 드러난 것이 있다.
이밖에도 굽은 활의 화살통은 창원 도계동 19호움무덤(철제 화살통),합천 옥전 5호무덤, 합천 봉산면 반계A호무덤 (금동제 화살통) 등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합천 옥전 M1호무덤에서는 금동제화살통이 5개, 31호무덤에서는 철제화살통이 드러났다.
5.창
창도 옛날에는 막강한 무기였다.백병전에 사거리가 길어서 유리하고 기마병에 대적할 보병들의 유력한 수단이 되고 뭉칠수록 강력해서 수비에 유리했다.
손에 쥐고 찌르니 큰 움직임이 없고 힘이 집중되어 피해를 크게 줄수 있었고 여차하면 투창으로 던지는 원거리 무기까지 될 수 있었다.
창 또한 보병용과 기병용이 있었고 의장용으로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용도로도 쓰였다.자루는 나무로 쓰여 남아있지 않으나 쇠날이 남아 확인할 수 있다.
진주 옥봉7호무덤과 진주 수정동3호무덤에서 보병용 쇠창이 발견되었고 일반적인 뽀족한 창의 형태였다.
창원 마산현동유적에도 창이 나왔고 합천 옥전 M호 무덤에서도 창이 나왔지만 후자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4지창이 나왔다.기병용 창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있었을것으로 추정한다.
6.유자무기(가지극)
유자무기류는 날끝이 창처럼 뾰족하지 않고 원만하며 주위에 괄고리와같은 가시들이 달려 있다.이것으로 기병을 걸어 끌어내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가시가 작다는 점 때문에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특수한 목적으로 공성전의 사다리를 끌어내거나하는 등의 용도로도 사용되었을수 있으나 그랬다면 쇠낫이 더 유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삼국시대에는 가야를 비롯해 이런 유자무기를 활용한 가지극부대가 따로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병종으로 따로 분류된것을 보아 군사적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후 유자무기는 더 변형되어 의장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의기류}
의기류는 흔히 의장용 무기를 말하는 것으로 행군을 할때 우리군을 상징하는 표식,장물로 사용되거나 높은 장수들이 위용을 과시하는 등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철제 의기류라 할만한 것은 유자무기가 변형된 유자이기(미늘쇠)가 있다.
1.미늘쇠(유자이기)
미늘쇠는 위에 유자무기가 의장용으로 변형된 것으로 군대가 행군 할때 상징하는 표식,군대의 위용을 과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제사를 지내거나 장례를 치를 때도 사용된 것으로도 보인다.형태는 위쪽의 삼각형 구멍을 내고 때낸 조각을 매달아 소리가 나게 하고 외각 가장자리에는 새 모양을 덧붙여 장식했으며 작은 구멍들을 뚫어 그 사이에 실을 끼워 흩날리게 했다.
유자이기는 새모양 유자이기가 대표적인데 새는 저승을 인도하는 영혼의 길잡이이다.그렇기에 부장품으로 출토되는 것을 보아 장례풍습과 연관있어 보인다.아마 죽은이의 장례를 치를때,특히 권력자일 경우 상여를 앞에서 이끌며 추모하기 위해 사용된것이 아닌가 싶다.주로 함안 도항리,합천 옥전 M1,M2,M3,M6호 무덤에서 의기용 미늘쇠가 출토되었다.
이밖에도 몸을 보호하기 위한 철제 갑옷,보호 장구와 말을 보호하는 마갑,말을 타는데 필요한 편자,등자,재갈 등 마구가 있지만 이는 따로 다루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