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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않는 봉황의 나라} -아라가야사-(2) 「건축과 공예」

운사(云史) 2024. 4. 8. 01:27

 
 
 
아라가야의 역사에 관하여 2편
(고고학적 유물로 보는 건축과 공예,그리고 말이산고분군)
 
 
 
지난 편에는 함안의 지리와 아라가야의 문헌상의 역사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문헌은 사료의 전부가 아니기에 그시대의 기술,발전상을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아라가야의 역사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건축과 공예기술을 정리하고 서술하도록 한다.
 
그전에 우선 함안의 고분군을 조금 알아보기로 한다.
아라가야의 고고학적 자료는 거의 무덤떼에서 나오기 때문에 아라가야의 중심지인 함안의 무덤을 지나칠 수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함안의 무덤떼는 규모가 거대하여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장 크고 대표적인 무덤떼는 말이산 무덤떼이다.
 
말이산 무덤떼는 가야읍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그리 높지 않은 구릉 위에 분포되어 있다.
여기에는 대략 40기의 대형무덤들이 있다.사실상 크고 작은700기의 무덤이 떼를 이루고 있다.
이에 1587년에 쓰인 {함주지}에는 "소골의 동서 언덕 위에 무덤이 있어 높고 큰 것이 구릉 같고 40여 기나 된다고 하며
전해오기를 옛 국왕의 무덤이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말이산의 '마리(말이)'는 머리,즉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실제로 함안의 중심에 위치한 말이산 무덤떼는 그 때문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유네스코도 그 가치를 알았는지 작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되기도 했다.
 

말이산 고분군의 전경,경주고분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말이산 고분군은 단순 아름다운것 뿐만은 아니다.많은 유물이 출토되었고 뛰어난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발굴작업이 이어져 왔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오래걸리고 또 발굴 할때마다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말이산 고분군에서 출토된 수많은 토기류(출처:경향신문)

 
 
예를 들어 발굴사례 하나만 소개하자면  
말이산 고분군 34호는 1917년에 조사발굴 되었는데 무덤은 높이 10m나 되는 대형무덤이였다.
축조시기는 5세기 후반경으로 무덤칸은 수혈식돌칸으로 그 안에는 많은 양의 유물이 드러났다.
 
유물은 민고리 자루큰칼(잔결), 칼자루모서리가 둥근 큰칼, 직호무늬가 들어간 사슴뿔로 만든 칼자루장식칼, 쇠창, 쇠활촉, 쇠갑, 채양 달린 투구와 사발모양투구, 안교 둥근 등자, 행엽 등의 무기와 마구류, 은색과 검은색으로 무늬를 그린 칠기(산결)와 굽잔, 큰 독, 수레모양토기, 오리모 양토기, 기대 등의 질그릇류이다.
 
그중 눈에 띄는 점은 수혈식돌칸으로 나무곽을 쓰지 않았다는건데 무슨 말이냐면 금관가야처럼 나무곽무덤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또 유물로는 통모양도기와 함안형이라고 부르는 질그릇이 많이 드러났다.

별거 없어 보이자만 이 발굴사례는 전체의 1%도 되지않고 발굴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게다가 진주,합천,의령,창원 등 아라가야의 권역의 고분군도 포함하면 그 자료는 수없이 많을것이다.하지만 발굴조사는 한정적이고 속도도 느리다.같은곳에서 새로 발견되는 경우도 허다한데 아라가야 권역 일대에 밝혀지지않은 유물들은 여전히 기나긴 잠을 자고 있을것이다.

 
이를 볼때 아라가야의 중심부였던 함안에 말이산 고분군과 같은 거대고분군은 아라가야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라가야의 귀중한 사료를 간직한 말이산 고분군은 함안이 일국의 수도였다는것을 여전히 보여준다.
이밖에도 합천 옥전고분군,의령과 진주의 일부지역,창원 등에서도 아라가야계 유물이 보이며 아라가야의 영향권을 짐작할수 있도록 일조하고 있다.
긴 설명은 뒤로하고 이제 그 유물들을 통해 건축과 같은 축조기술,공예기술 등을 보도록 한다.
 
 
 
 
{아라가야의 건축}

1.집

아라가야인의 집은 위에 말이산 고분군에서 출토된 집모양 토기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집은 형태는 2가지로 추측하는데

첫째는 고상가옥이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한눈에 보더라도 전형적인 고상가옥이며 특이하게 계단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다리를 이용해서 집을 드나들었을 것이다.4개에서 8개쯤의 기둥을 바닥으로부터 집과 지면을 분리해둔 이 형태는 미얀마나 베트남같이 동남아 일대의 열대기후에서 나타나는 집이다.뱀이나 천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집을 올린것이다.과거 기후는 발해땅에서도 벼가 자랄만큼 온화했기에 상대적으로 남해안은 열대기후가 나타나 고상가옥을 지었거나 동남아,인도까지 해상교류를 하며 가옥이 전파되었거나 등의 이유로 고상가옥이라 추측한다.

2번째 추측은 토기의 고상가옥이 곡물창고라는 것이다.
문의 입구가 좁고 쥐의 침입을 어렵게 하기위해 고상가옥으로 지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무엇보다 고구려의 곡식창고인 부경도 이와 비슷하게 문이 있고 지상보다 높게 지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온돌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고상가옥은 힘들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현재 학계에선 고상가옥이라는 의견이 주류이다.
뭐가 되었든 앞으로 더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2.가마터와 온돌

아라가야인은 한민족의 공통적인 특징인 온돌을 보유하고 있던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위지 변진]조에 '가야인들의 집은 가마터가 모두 집 서쪽 모서리에 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아라가야 또한 예외도 아니였을것이다.이것은 취사와 난방을 가능케 한 가마터와 온돌을 설치했다는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아직 온돌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김해 부원동 유적에선 타원형 가마터와 온돌이 확연히 드러났고 아라가야 또한 타원형 가마터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아라가야의 대형 오름가마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크기가 11m에 이르기까지 했다.가마 구조는 소성부(토기 두는 곳)와 연도부(연기가 빠져나가는 곳)사이에 낮은 계단이 있는 등요로서 기존에 확인된 다른 가마들이 계단이 없는 무계단식 등요였던 것과는 조금 다른 특이한 형태였다.

가마터는 토기를 생산하는 곳으로 아라가야의 토기 제작이 그주변의 토기폐기장과 가마터를 통해 국가규모로 생산되었다는것을 알 수 있다.

함안 법수면 우거리 유적에서 나온 계단식 가마터와 토기폐기장(출처 : SBS 뉴스)

 
 
 
3.무덤

위에서 언급한 바가 있지만 가야는 대체로 수혈식 돌칸을 썼다.가야지역에는 거의 다 분포 되었다고 보면 된다.
수혈식 돌곽이란 관을 안치할 무덤구덩이를 돌로 올려 쌓은 장방형의 곽을 말한다.그러나 네 벽은 돌로 쌓았기 때문에 관을 위로부터 내려 안치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수혈식이라고 한다.

결론적으론 수혈식 무덤이란 네 벽을 돌로 쌓고 위로부터 관을 안치한 다음 뚜껑이 될 돌을 씌우고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이것이 가야무덤의 주류이고 아라가야 또한 그렇다.물론 부차적으로 독무덤 등 다양한 무덤이 있고 뚜껑 돌을 나무로 쓰거나 등의 차이점도 많이 있다.
 
최근에는 말이산 고분군 13호분에서 아라가야의 독창적인 축조기술이 확인되었는데
무덤방은 높이 1.8m, 길이 9.1m의 당시 최대 규모 공간으로,중앙에 시신을 안치하고 한쪽에 순장자를, 다른 쪽에 부장품을 묻도록 되어있다. 연구진은 이에대해 대형 돌덧널무덤의 축조와 관련된 '특수통로 시설'과 봉토를 효율적으로 쌓기 위한 '중심분할 석벽' 축조공법 등이 아라가야 왕묘의 독창적인 토목기술이라고 밝혔다.

4.성곽과 토성

아라가야는 또한 성곽이 많은 나라이다.대표적으로 함안 안곡산성은 함안군 칠서면과 대산면 경계에 걸친 안국산 정상부를 따라 축조된 좁고 긴 형태의 테뫼식 산성(둘레 1231m)이다. 이는 내성(둘레 821m)과 외성(둘레 410m)이 있는 복곽성이다.

안곡산성은 낙동강과 창녕지역까지 모두 가시권에 들어오는 곳에 입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아라가야가 신라 등 주변 세력의 침입을 대비해 군사적 요충지에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왔다. 
이밖에도 동지산성, 대산면산성,방어산성,성참산성, 포덕산성등 여러 산성이 있다.
다른 가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성이 많았던 것이다.
이것은 아라가야가 강력한 방어력과 질서있는 국가 체계를 지닌 나라라는것을 시사한다.
아라가야의 산성 축성법은 가야국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일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가야와 교류하며 일본내 가야거류지를 통해,또는 가야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며 전수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2018년부터 발굴중인 아라가야 왕궁 추정지에서 드러난 토성은 가야권역에서 발견된 동시기 유적과 비교할 때,그동안 발견된 사례가 없는 축조기법과 규모를 보인다.흙을 쌓는 과정에서 성벽이 밀리지 않도록 축조 공정마다 나무기둥을 설치했으며,판축 과정에서 흙을 쌓아 다지는 등 매우 정교한 축조기법을 사용했다.성벽 상부에는 2열의 나무기둥이 확인되는데, 방어시설인 목책으로 추정된다.

왕궁 추정지를 둘러싼 토성의 범위(출처:연합뉴스)


토성의 규모는 현재 조사구역(2필지, 약 1,300㎡) 내에 한정 짓는다면, 전체 높이는 8.5m, 상부 폭은 20m~40m 내외이며,규모로 치면 동시기 가야권역에서는 유례없는 대규모이다.

5.왕궁

현재 왕궁터는 발굴작업이 진행중으로 완벽하게 밝혀지진 않았다.하지만 조선시대 함주지의 기록과 일제강점기 고적조사보고에도 함안 가야리 일대로 추정되어 왔다.
현재 그 규모를 보아선 왕궁지가 확실시 된 상황이다.

왕궁의 건물터는 현재 정확한 형태와 규모를 추정하기 어렵지만, 고상건물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기반암(基盤岩)을 인위적으로 파서 조성한 구덩이는 긴네모꼴이며 용도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태이다.하지만, 구덩이 안에서 부뚜막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고,주로 고분 등 의례 공간에서 나오는 통형기대가 출토되어 특수한 목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취사시설 또한 확인되었다.동쪽에는 아궁이를 두었으며 아궁이와 서쪽 배연부 사이에는 구들을 설치했는데 아궁이는 하단부만 남아있어 정확한 규모와 형태는 파악할 수 없는 상태다.구들은 최대 길이 약 1m, 높이 약 50cm의 평평한 돌을 세우고 그 외부에 회색 점질토를 발라 연기가 외부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하였다.

구들 상부는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구조는 파악할 수 없으나 구들 내부에서 일부 판석재들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측벽과 같은 방법으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배연부는 깬돌을 가로로 눕혀쌓기하여 만들었으며 연기가 잘 빠질 수 있도록 계단식으로 만들어 높이차를 두었다.
배연부 근처에 원형구덩이를 보아 취사용 물을 사용하기 위한 저장고로 보이고 취사부지 외곽에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이 있는것으로 보아 외벽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취사용 토기들도 함께 발굴되기도 했다.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중이기에 최신자료는 왕궁의 신비한 사실들을 점차 알려줄 것이다.

{공예}
아라가야는 다른 가야국과 마찬가지로 공예가 매우 발전한 국가이다.철,옥,금,은,동 등을 통해 우수한 공예품들을 만들었으며 질그릇,장신구,나전 칠기와 같은 것들이 그 예이다.다양한 물품에 세공기술이 적용되었으며 아름답고 정교하여 유시,금속 세공기술이 얼마나 뛰어나고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1.장신구

장신구는 귀족들이 호화스러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이를통해 아라가야의 귀족들의 생활을 엿볼 수도 있다.

아라가야의 대표적인 장신구는 봉황모양 금동관으로 1편의 메인배경이 된 사진이다.
불꽃이나 나무열매,꽃을 형상화 한 가야의 금동관과는 달리한다는걸 한눈에 봐도 알 수 있고 신라의 자형 관과 계통을 달리한다.아라가야의 오랜 전통과 고유함을 잘 살린 고유하고도 독특한 금동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귀걸이와 목걸이는 남녀의 구분없이 이용된 장신구이다. 금,청동,금동으로 다양하며 귀걸이는 의령군에서 출토된게 대다수이고 귀고리(이식)만이 출토되었다.의령군은 일부지역이 아라가야의 영향권 내에 들었고 소가야등 다른 가야의 점이지대나 다름이 없어 소가야제인지 아라가야제인지는 불분명하나 차이는 없는것으로 보인다.
합천 옥전고분군에서는 뛰어난 세공술의 아름다운 귀걸이들이 출토되었는데 금,은,금동으로 다양하며 형태에 따라 민고리귀걸이,금동세환고리 등으로 분류된다.특징은 세환식으로 관통되어 있다는 것과 중간장식,드림장식이 있다는 점으로 이는 다른 가야국도 대체로 그러하다.중간장식은 속이 빈 알 모양이고 드림장식은 풀,꽃봉오리,방울 모양 등이 많고 매우 세밀하고 정교하다.

목걸이는 대체로 하나의 큰구슬+굽은 구슬 몇 개를 중심으로 작은구슬 수십개를 꿴 것이다.그밖에 유리나 옥구슬에 금속제 구슬을 섞은 목걸이,한개의 굽은 구슬을 중심으로 꿴 목걸이 등 여러가지가 있다.이밖에도 유리구슬,옥,팔찌,반지 등이 장신구로 활용되었다.

아라가야의 목걸이와 금동제 이식(귀걸이){국립진주박물관}


2.토기

아라가야의 토기 또한 일찍부터 발전했었다.진흙으로 공예적 성격이 띠는 여러가지 질그릇을 제작했는데 크게 식기류와 상형토기가 있다.아라가야는 초기에는 금관가야의 영향을 받아 경질토기와 연질토기 등이 쓰였다.

4세기에 이르러 고식 도질토기가 등장하였는데,이후 5세기가 되면 아라가야만의 토기가 나타난다.

아라가야 토기의 가장 큰 특징은 굽다리접시에 불꽃 모양의 굽구멍을 뚫은 점으로 이런 굽다리접시에는 뚜껑받이 턱이 없다.또 금관가야의 원통형 그릇받침과 달리 아라가야의 원통형 그릇받침은 하부가 부풀어 오르고 고사리무늬가 더해지기도 한 모습이다.


바리모양 그릇받침은 굽다리가 넓고 완만한 것에서 점차굽다리 윗부분이 좁아져 바리 부분이 강조되는 비대칭적인 모습을 보인다.큰항아리,그릇받침뿐만 아니라 긴 목 항아리도 간혹 출토되는데 뚜껑받이 턱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또 아라가야에는 무늬를 새긴 질그릇이 많은데 다른 가야국에서도 출토되지만 아라가야에서 주로 분포되어 있고 무늬는 보통 동심원 모양,톱니무늬등을 새긴다.


상형토기는 수레바퀴,배,집,사슴 등을 형상화 한 토기로서 여러가지가 있다.이는 일상생활에 쓰였다기보단 관상용이나 잔을 따르는 고급주전자,향로등의 역할을 했을것으로 추측된다.주로 귀족들이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한것으로 보인다.또한 낙타와 배등을 통해 국제무역이 이루어졌다는걸 알 수 있다.


이처럼 아라가야의 상형토기를 통해 독창적인 아이디어 5세기 전반 아라가야의 높은 수준의 토기 제작기술을 알 수 있다.특색 있는 토기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켰다는 것은 아라가야가 독자적 문화를 창조한 세력이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말이산 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양한 상형토기

 

함안의 아라가야 토기, 불꽃 모양 굽구멍을 뚫은 굽다리접시가 대표적이다.

 
 
3.옻칠공예
아라가야는 옻칠공예도 상당히 발전했었다.옻칠은 우리 민족 전통공예의 정수로 나무,금속 등에 옻나무의 수액을 칠해 윤을 내기위한 기법이였다.

다른 가야국에서도 옻칠공예는 흔히 볼수 있는 것이 아니였고 창원 다호리 유적,합천 옥전 유적,함안 말이산 34호무덤 등에서 칠기가 출토 되었다.

이중 가장 오래된것은 창원 다호리 유적의 칠기로 나무칼, 옻칠한 온갖 굽잔과 붓등이 모습을 드러냈다.시기는 1세기경 변한시대이며 소국이였을 골포국이 존재했던 시대이다.골포국은 훗날 포상8국의 난을 일으켜 아라가야를 공격한 국가중 하나였으며 끝내 패배한 국가로서 이후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라가야에 흡수되었거나 유명무실 해졌을 것이다.
4세기 즈음에는 창원이 아라가야의 권역에 들어서인지 아라가야계 유물이 나오는걸로 보아 확실히 흡수된 듯 하다.

말이산 고분군에도 칠기가 나오고 지리적으로 창원이 가깝다는것을 생각해보면 의령,진주,창녕의 일부지역과 후기에 들어 칠원,마산,창원이 아라가야의 세력권에 들었던 것처럼 창원또한 전쟁 이후 편입되었고 아라가야가 바다와 접한 진동만을 무역의 거점지로 사용하기 위해 더더욱 영향권에 두며 옻칠공예 기술이  아라가야로 건너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밖에 말투구,철판 등에 옻칠을 해 부식되지 않도록 한 것을 보면 아라가야의 발전된 옻칠공예에 토대하여 우수한 공예품들이 제작,사용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4.금동 및 청동공예
아라가야의 청동,금동공예 기술은 가야국은 물론 신라,백제에 견주어도 속색이 없다.
최근에 학계를 달궜던 아라가야만의 독창적인 특색이 담긴 쌍봉황새 금동관은 백제·신라처럼 관테와 세움장식 등을 따로 제작하지 않았다.
하나의 동판에 그림을 그린 뒤 장식 모양에 따라 뚫어서 조각하는 기법(투조)을 써서 제작했다.
당대 백제에는 못미치지만 결코 뒤떨어지는 기술력이 아니였다.
생활도구로는 초두도 있다. 초두는 발이 3개고 자루가 있는 일종의 냄비이다.구리제품으로는 함안 사도리에서 출토된 통모양동기가 있다.보통 통모양동기는 권력의 상징으로 본다.또 칼장식을 통해서도 공예기술이 나타나는데 함안과 합천에서 주로 출토되는 아라가야의 고리자루 큰 칼에 사용된 칼장식이 대표적이다.


용봉문 고리자루 칼과 봉황문 고리자루 칼등이 있지만
합천 옥전 고분군 단봉무늬 고리자루칼이 제일 일품이다.
누금세공기법을 사용했으며 고리자루에 새겨진 1마리의 봉황은 살아있는것처럼 세밀하며 생동감있고 손잡이 양쪽에 용은 그림보다 정교했다.어느정도인지 봉황에는 비늘과 같은 깃털이 있고  여의주를 문 용은 완전히 문것이 아니라 틈도 재현 했으며 입가의 주름,눈동자,비늘,손톱자국과 용 위의 아지랑이까지 섬세하게 구현했다.아라가야의 칼장식수법은 가히 당대의 백제,신라에 꿇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옥전4호무덤에서 상감무늬를 한 단봉환두큰칼을 통해 상감기법이 발전했다는것도 알 수 있고 옥전 12호 무덤을 통해 고구려 벽화에서 볼 법한 두꺼비모양을 묘사한 손칼자루 발견되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는것도 볼 수 있다.

함안 마갑총에서 출토된 민무늬고리자루칼은 금실과 은실을 휘감은 무늬나 번개문의 금상감기법을 이용한 칼장식도 확인되었고 특히 지금은 사라진 삼국시대 전통공예 기법인 금부가 사용되어 삼국간의 교류와 영향도 있었다는걸 알 수 있다.



이상으로 말이산 고분군의 짧은 설명과 아라가야의 건축과 공예기술을 서술해 보았다.
제철기술과 무기류,마구류 등을 서술하면 분량이 길어질것 같아서 이는 다음편에 다루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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