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가야의 역사에 관하여 1편
(문헌상의 역사, 함안의 지리)
독자들은 한 번쯤은 가야에 관해 배워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전기 가야연맹은 금관가야, 후기 가야연맹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움직였으며
그 외의 가야들은 이름만 잠깐 언급될 뿐 별다른 영향은 못 끼쳤다 여기고 지나가기 다반수였을것이다.
하지만 가야사를 알면 그들은 독자적이고 개성 있는 각자의 문화와 역사를 지녔으며
전기가야는 금관가야, 후기가야는 대가야라는 이분법적인 역사관은 그당시 가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기선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그늘에 가려진 제3가야, 아라가야를 다루고자 한다.
아라가야는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에 위치해 있었다.
아라가야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안야국, 안라국, 아시랑국, 아야가야, 아나가야를 비롯해 전라국,금라 등으로 표기되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르기를 본명은 안라가라이고 이두문자로 안라, 아니라 혹은 아니량으로 쓰였으며 후세에 와전되어 아시라, 아라가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함안의 아라가야는 변진의 12개국 중 안야국(安邪國)이라는 소국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함안은 남해안에 위치하고 있어 기후가 온화하고 땅이 기름져 농사에 적합했다. 그렇기에 수많은 인구를 부양할 쌀을 생산할 수 있었고 사람이 많아져 다양한 산업에 집약화가 이뤄져 뛰어난 기술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함안의 지리를 보면 북쪽에는 낙동강과 남강이 흘러들며 함안읍에서 남강까지 너비 2km 정도의 충적평지대가 펼쳐져 있다. 농경지는 가야읍과 함안면 등지에 있고 관개용 수로는 남강과 신음천의 지류, 광정천 그리고 여러 계곡의 시냇물들이 이용되었다. 남으로는 여항산, 비박산등 남해안 산줄기가 가로 놓여있고 동남으로는 무학산, 천주산등이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방어산, 북쪽은 진주 방면으로 흘러내리는 남강이 있다.
함안 주변의 산들은 해발 500~800m에 해당하는 고봉들로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고 있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유리했다.남서로는 여항산(770m)과 방어산(530m) 등이 산줄기를 이루고 북으로 남강과 낙동강이 흘러 남고북저의 지형이다.남으로 해안산맥이 고성에서 김해까지 동서로 걸쳐 있어 대체로 지세가 험준한 산지를 이루며, 북부의 저지부와 남부의 고지로 양분되는 지형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지역이다. 남부에 여항산·봉화산·서북산·천주산·미산령·광려산·비박산·방어산, 동부에 오봉산·작대산·무릉산, 중앙부에 자양산 등이 주로 있고,남고북저의 지형으로 물이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함으로써 두 강의 연안에는 평야가 비교적 넓게 발달되어 있다.영운천이 방어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가 남강에 흘러들고, 석교천이 오봉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 남강으로 흘러들고 있다.중앙에서는 남부의 여항산·서북산 부근에서 발원한 검암천 또는 함안천이 북류하며 함안,가야를 지나 낙동강에 흘러든다. 또한 동남부에서는 광려천이 광로산에서 발원하여 길게 북류하며 칠원천·운곡천·가연천 등을 합한 뒤,대산면에서 낙동강에 합류하고 있다.
아라가야는 함안 뿐만아니라 산을따라 주변일대도 영토로 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창녕 일부 지역에서 아라가야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이다.이처럼 함안은 남으로는 산, 북으로는 강을 끼고 좌우에 산이 둘러싸 있기에 천험의 요새였다.
아라가야가 발전을 이룩한 것은 천혜의 자연환경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함안의 지리에 관해 알아보았으니 역사를 보도록 한다.
아라가야에 관한 문헌자료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문헌기록을 통해 아라가야에 관한 역사를 볼 수 있다.
가락국의 건국설화에 6가야의 왕은 모두 금합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姓)을 김(金)씨로 하고 각기 도읍한 땅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그중 아라가야의 시조는 수로왕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아로왕(阿露王)이다. 아로왕이 백제계 비류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긴 하지만 좀 더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아라가야의 최초의 기록은 중국 삼국지-위지-동이전-한전에 나오는 변한의 안야국이었다. 기존 정치집단에서 김수로와 형제들과 같은 또 다른 정치세력으로 교체되었다는 것을 신화로서 짐작해 볼 뿐이며 이는 고조선이 멸망한 후 고조선의 유민들이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남하했었던 것일 것이다. 아라가야는 이후의 제대로 된 역사가 기록되지 않았다.
문헌상에는 한반도 남부에 70여 개국이 있었고
큰 나라는 4천~5천 가구, 소국은 6백~7백 가구를 이루었는데
2~3세기에 이르러 금관가야와 아라가야는 대국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금관가야와 아라가야는 철의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구성했고 이로서 크게 번창했기 때문이며 이는 많은 고고학적 근거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고학적 근거들은 다음에 다루도록 하고 문헌기록들만 보도록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 제2 내해이사금 조에 의하면
서기 3세기 내해이사금 14년 7월에 포상팔국이 가라(가야)를 침략하고자 하니 가라의 왕자가 구원을 요청했고 신라가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을 보내 팔국의 장수를 죽이고 가야 포로 6천 명을 되돌려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 권 48 물계자전에 의하면 포상팔국이 아라국을 치니 아라국은 신라에 원병을 청했고 신라는 왕의 손자 날음, 물계자 장군을 비롯한 6부의 군사를 동원해 6천 명의 포로를 송환하고 무찔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간추리자면
'201년 금관가야의 거등왕이 신라에 동맹을 요청하자 신라가 받아들였다.
209년, 고자국을 비롯한 8국이 금관가야와 아라가야에 반란을 일으켰다.
212년, 고자국과 골포국, 칠포국이 신라의 갈화성을 공격하자 금관가야와 신라가 힘을 합쳐 승리를 거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이른바 ‘포상팔국(浦上八國) 전쟁’이다. 포상팔국은 포(浦), 즉 항구를 끼고 있는 고성 창원 사천 칠원 등지의 8개 나라로 모두 변한에 속해있거나 일부 마한에 속해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밝혀진 국가는 보라국, 사물국, 골포국, 철포국, 고사포국, 고자국 등이었다. 여기서 고자국은 소가야의 전신국이었다.
이를 통해 3세기 초엽에 한반도 남부에서 대규모 격전이 있었으며 아라가야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이후 보라국 등 소국들은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흡수되거나 세력이 약해져 멸망했을 것이다. 기록의 가야가 금관가야인지 아라가야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둘 다 같이 보기도 하고 최근엔 아라가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엇이 되었든 중국-왜-낙랑-가야를 잇는 해상무역 중계권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었으며 각국의 번영과 생존권이 직결되는 문제였다.
포상팔국의 난은 한반도 남부 고대전쟁 중 손에 꼽을 대규모전쟁이자 고대문명 간의 철 교역권을 다툰 전쟁이었다. 필시 포상팔국이 공격한 이유도 철 산지와 남강, 낙동강을 통한 철 교역권, 기름진 땅을 확보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가야는 신라보다 우위였으며 동아시아를 넘어 인도까지 이어진 해상 무역 네트워크를 구성했기에 더더욱 필요했었을 것이다.
이후 학계에서는 가야의 무역중심이 늑도(사천) 교역에서 김해 교역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늑도교역지는 김해교역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끝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 후
아라가야는 차츰 회복해 금관가야국에 못지않은 국력을 가지게 되며 지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세기말~5세기 초 광개토태왕 10년(400년)에 고구려는 보병-기병으로 이뤄진 5만의 군대를 왜로부터 공격받는 신라(내물왕)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시켰다고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남거성부터 신라성까지 꽉 찼던 왜군을 격파해 가며 왜군을 쫓아 배후의 금관가야를 공격했으며 금관가야의 종발성을 항복시켰다. 문자의 탈락이 심해서 자세한 내막과 전투활동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고구려 남정기사’는 광개토대왕은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한 왜를 쫓아냈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안라인수병’의 문구를 두고 갖가지 해석이 등장했다. 그중에는 ‘안(安)’을 술어로 해석해서 ‘신라(羅) 병사를 안치(安)했다(배치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혹은 ‘라(羅)’를 순라 혹은 순찰을 의미하는 ‘라(邏)’자의 동의어로 보아 ‘고구려의 순라병을 배치한 것’이라는 풀이도 있다.
그러나 ‘안라’를 고유명사로 보아 그냥 ‘안라국(아라가야) 별동대’ 혹은 ‘안라국 수비대’로 해석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았다. 예를 들어 북한의 학자 조희승은 '.... 안라인수병....'이 여러 군데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군이 아라가야의 변방군과 여러 차례 격전을 치렀을 것이며 아라가야 수비군의 반격으로 일시적으로 신라성까지 타고 앉는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으나 왜군이 크게 무너졌고 격퇴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만일 아라가야의 성과가 있었다 해도 당시 고구려의 개마무사에 버금갈 첨단 무기무장을 갖추고 있던 만큼 가능성도 시사해 볼 만하다.
고구려남정의 주목적은 고구려가 백제를 견제·제압하는 것이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한강 진출을 둘러싸고 일진일퇴하며 ‘30년 전쟁’을 벌였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의 위협 속에서 가야-왜를 잇는 3국 동맹 축을 만들어 활로를 모색했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무력은 압도적이었고 전쟁의 승자는 고구려, 패자는 뜻밖에도 금관가야였다. 이를 계기로 전기가야연맹은 해체되고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며 금관가야에 가려진 두 강대국인 아라가야와 대가야가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5세기 가야의 처지는 꽤나 암울했다. 위로는 고구려를 막기 위해 신라-백제가 동맹을 맺고 가야와 왜까지 참여했지만 점차 느슨해지면서 고공성장을 하던 신라가 정복의 칼을 쓸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금관가야는 힘을 다했고 대가야와 아라가야가 1인자 자리를 두고 끊임없이 경쟁했다. 또한 비화가야, 약화된 금관가야 또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다양한 세력이 견제해 나갔다. 가야연맹을 이끌 구심점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린 대가야가 후기가야를 주도했으며 다른 가야는 별 볼일 없는 구성원이라고 배우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고고학적 자료들과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아라가야는 전기가야연맹의 양대세력이었으며 후기에는 대가야를 견제하는 남서부 중심세력이었을 것이라는 게 밝혀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전기기야에서도, 후기가야에서도 줄곧 2인자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적 근거는 예사롭지 않다. 장대하고 압도적인 왕궁터와 성곽, 수많은 토기와 철제 무기들, 독자적인 금동관과 교역의 상징인 중국청자까지.... 아라가야를 1인자라고 불러도 될 만큼의 발굴이 허다하게 나오고 있다.
고고학적 근거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고 우선 문헌상의 기록 중에
<남제서> ‘동남이 열전·가라’ 479년조를 보면
“가라왕 하지가 남제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자 ‘보국장군본국왕’에 제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동안은 이때 남제의 작위를 받은 ‘가라왕 하지=대가야왕’이라는 해석이 통설로 여겨졌는데
후기가야연맹체의 맹주가 대가야라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479년, 바로 그 무렵에 중국에서 제작된 청자가 함안에서 출토되자 새로운 해석이 나왔다.
바로 <남제서>의 ‘가라왕 하지’는 대가야왕이 아니라 아라가야 왕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왕궁터, 금동관, 별자리 덮개석, 중국제 청자 등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곡으로 점철된 부분이 많아 인용하기 꺼려지는 일본서기에서도 (<일본서기> ‘흠명기(544년))에
“임나는 안라를 형(兄) 혹은 아버지(父)로 여겨 오로지 안라의 뜻을 따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야의 여러 나라가 안라(아라가야)를 형님으로 모신다는 말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529년 남부의 여러 세력이 안라(아라가야)를 중심으로 자구책을 모색하고, 이에 안라가 백제·신라·왜의 사신을 초빙하여 새롭게 조성한 고당(高堂)에서 국제회의를 주도한다.
이른바 '안라 고당회의(高堂會議)'였다.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고, 신라가 탁기탄(경남 밀양)을 멸망시키는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회의 개최 목적은 양국의 세력을 미리 차단하는 것. 회의 참석자는 안라 국주(아라가야 왕)와 대인(大人), 신라 사신 2명, 왜 사신 1명이었다. 새로 만든 높은 당(고당) 위에서 회의가 진행됐다. 백제 또한 장수 3명을 파견했으나 박대당하며 내쫓겼고 신라는 고위직을 파견하지 않는 등 순조롭지 않았지만 아라가야가 이 회담을 통해 가야를 이끄는 대국임을 드러내는 외교적 성과 또한 있었다.
비록 이 국제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안라(아라가야)가 가야국가와 주변의 제국들이 인정하고 당대의 국제정세를 주도한 유력한 나라였음을 암시해 준다. 아라가야는 후기가야 연맹의 맹주이자 고대 한국의 강소국이었다.
이후에 아라가야는 마지막으로 6세기 중엽 신라에 의해 통합되고 말았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아라가야는 끝내 강국을 유지하지 못했다.
{삼국사기}(권 34 지리지 함안군)에는'법흥왕이 많은 병력으로서 아시랑국(아라가야)을 멸망시켜 그 땅을 고을로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금관가야는 524년 법흥왕 때 항복해서 나라가 망했으니 좀 더 서쪽에 있는 아라가야는 532년~540쯤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 결국 강대국 고구려와도 맞서 싸웠던 아라가야는 6세기 중엽에 이르러 거의 600년의 역사의 마침표를 고하게 되었다.
이로서 장장 600년에 가까운 아라가야의 역사를 끝맺었다.
여기까지는 문헌상의 역사였다.
언제든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지거나 사료간의 상호증명이 새롭게 바뀌며 달라질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문헌상의 역사는 그시대의 생활양식과 경제,문화를 담지 못한다.
다음 편에는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볼수있는 아라가야의 건축과 세공술,무기와 제철제강술,경제와 문화 등을 차례로 서술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