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가야의 역사에 관하여 1편
(아라가야의 지리,문헌사)
가야사를 배움에 있어서 보통 전기 가야연맹은 금관가야, 후기 가야연맹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움직였으며
그 외의 가야들은 연맹왕국의 일원이자 별 영향력도 없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들은 독자적이고 개성 있는 문화와 찬란한 역사를 지녔다.
또한 전기가야는 금관가야, 후기가야는 대가야라는 이분법적인 역사관은 그당시 가야를 이해하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기선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그늘에 가려진 아라가야를 순차적으로 세분화해서 다루고자 한다.
1. 아라가야의 지리
아라가야의 주요 무대인 함안의 지리를 보면 북쪽에는 낙동강과 남강이 흘러들며 함안읍에서 남강까지 너비 2km 정도의 충적평지대가 펼쳐져 있다. 농경지는 가야읍과 함안면 등지에 있고 관개용 수로는 남강과 신음천의 지류, 광정천 그리고 여러 계곡의 시냇물들이 이용되었을 것이다.
남으로는 여항산, 비박산등 남해안 산줄기가 가로 놓여있고 동남으로는 무학산, 천주산등이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방어산, 북쪽은 진주 방면으로 흘러내리는 남강이 있다.
함안 주변의 산들은 해발 500~800m에 해당하는 고봉들로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고 있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유리했다.
남서로는 여항산(770m)과 방어산(530m) 등이 산줄기를 이루고 북으로 남강과 낙동강이 흘러 남고북저의 지형이고 남으로 해안산맥이 고성에서 김해까지 동서로 걸쳐 있어 대체로 지세가 험준한 산지를 이루며 남고북저 지형상으로 물이 낙동강과 남강이 쉽게 합류함으로 두 강의 연안에는 평야가 넓게 발달되어 있다.
구체적인 산줄기는 남부에 여항산, 봉화산, 서북산, 천주산, 미산령, 광려산, 비박산, 방어산이 있고 동부에 오봉산, 작대산, 무릉산 등이, 중앙부에 자양산 등이 주로 있다.

합류하는 물줄기로는 영운천이 방어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가 남강에 흘러들고, 석교천이 오봉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 남강으로 흘러들고 있다.
중앙에서는 남부의 여항산·서북산 부근에서 발원한 검암천 또는 함안천이 북류하며 함안,가야를 지나 낙동강에 흘러든다. 또한 동남부에서는 광려천이 광로산에서 발원하여 길게 북류하며 칠원천, 운곡천, 가연천 등을 합한 뒤,대산면에서 낙동강에 합류하고 있다.
뒤늦게 영토를 확장할때에는 진동만을 통해 더욱 해양진출이 수월해지기도 했다.
이처럼 함안은 남으로는 산, 북으로는 강을 끼고 좌우에 산이 둘러싸 있기에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좋으며 강을통해 농사와 무역에도 큰 이점을 얻었다.
그러나 반대로 유리한 지리적 이점은 팽창 야욕을 늦추는 요인이 되었다. 유리한 방어,수운교통의 편리함,질 좋은 농지,풍부한 철은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국방에 큰힘을 쓰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기에 충분했으며 페니키아처럼 바다로 진출해 교역을 중심으로 하는 항시국가가 되었다. 지나친 이점은 성장을 저해하며 결국 소국으로 남은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한다.

2.아라가야의 문헌사
아라가야에 관한 역사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문헌기록을 통해 아라가야에 관한 역사를 볼 수 있다.
가락국의 건국설화에 6가야의 왕은 모두 금합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姓)을 김(金)씨로 하고 각기 도읍한 땅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그중 아라가야의 시조는 수로왕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아로왕(阿露王)이다. 아로왕이 백제계 비류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긴 하지만 좀 더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아라가야는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었는데
안야국, 안라국, 아시랑국, 아야가야, 아나가야를 비롯해 전라국,금라 등으로 표기되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르기를 본명은 안라가라이고 이두문자로 안라, 아니라 혹은 아니량으로 쓰였으며 후세에 와전되어 아시라, 아라가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아라가야의 최초의 기록은 중국 삼국지-위지-동이전-한전에 나오는 변한의 안야국이었다. 기존 안야국이라는 정치집단에서 김수로와 형제들과 같은 또 다른 정치세력으로 교체되었다는 것을 신화로서 짐작해 볼 뿐이며 이는 고조선이 멸망한 후 고조선의 유민들이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남하했었던 것일 것이다.
당시 한반도 남부에 70여 개국이 있었고
큰 나라는 4천~5천 가구, 소국은 6백~7백 가구를 이루었는데 안야국은 그중 하나였다.
이후의 기록은 한동안 보이지 않지만 4세기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라가야(안라국)의 4세기 대에는 고조선 유민과 해외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며 이미 정치,사회적 발전이 상당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자발(比妹)·남가라(南加羅)·탁국(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 7을 평정하였다. 「일본서기」권 9. 신공기 49년(369) 3월조
위 사료의 내용 중 주목할만한 것은 4세기 대에 안라, 다라, 탁순 등의 가야 정치체가 성장하였다는 근거로 볼 수 있다.비록 일본서기의 안라국은 아라가야의 분국으로 일본내에 존재했으며 한반도의 본국은 멀쩡히 존재한다.
여러 고고학적 근거를 통해 확실시 된 분국설은 식민지가 아니며 일본의 뿌리가 된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하지만 분국에 관해서는 차후에 다루도록 하고 아라가야 본국이 일본열도에 진출해 분국을 세울만큼 정치적으로 안정적이고 기술이 발달했다는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4세기 대 아라가야(안라국)의 외교 및 교류에 대한 문헌기록도 있다.
성명왕(聖明王)은,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王), 귀수왕(貴首)의 때에, 안라(羅)·기라(탁순의 한기)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고 서로 통교하여 친교를 두터이 맺어, 자제(子弟)의 나라로 여기고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일본서기』 권 19 天皇 541년 4월
여기서 사료의 속고왕은 근초고왕, 귀수왕은 근구수왕이다. 근초고왕의 재위연대는 346~375년, 근구수왕은 375~384년으로 4세기 중후반까지는 백제와 아라가야(안라)는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4세기 대의 아라가야의 정치체의 발전에는 획기적인 계기가 있었을까? 고조선 유민의 남하,해양을 통한 타국과의 해외 무역, 선진기술의 수용과 발달 등이 있지만 3세기 말 벌어진 전쟁을 무시할순 없다.
6년(201) 봄 2월에 가야국(加耶國)이 화친하기를 청하여 왔다. 14년(209) 가을 7월에 포상팔국이 가라(加羅)를 공격할 것을 모의하자, 가라 왕자가 신라에 와서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석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湌) 이음에게 6부(部)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가라를 구해주라고 명령하였다. 석우로와 이음은 포상팔국의 장군들을 죽이고, 포상팔국에 포로로 잡혀갔던 가라인 6,000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17년(212) 봄 3월에 가야(加耶)가 왕자를 볼모로 보내왔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나해이사금
제10대 나해왕(奈解王) 즉위 17년 임진에 보라국·고자국, 지금의 고성·사물국 지금의 사주(州) 등 8국이 힘을 합쳐 변경을 쳐들어왔다. 왕은 태자 날음(音)과 장군 일벌(一伐) 등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과 겨루도록 하니, 8국이 모두 항복하였다. 20년 을미(乙)에 골포국, 지금의 합포이다. 등 3국의 왕이 각각 병사를 거느리고 갈화(竭火)를 공격해 왔다. 굴불(屈弗)이 의심되는데, 지금의 울주이다. 왕은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그것을 막자, 3국은 모두 패하였다.
『삼국유사』 열전 피은 물계자전
위의 기록들은 국내문헌상에 아라가야가 등장하는 최초기록으로 전쟁을 통해 언급된 것이 보인다.
이 전쟁이 이른바 ‘포상팔국(浦上八國) 전쟁’이다.
포상팔국은 포(浦), 즉 항구를 끼고 있는 고성, 창원, 사천, 칠원, 합포 등지의 8개 나라로 모두 변한에 속해있거나 일부 마한에 속해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밝혀진 국가는 보라국, 사물국, 골포국, 철포국, 고사포국, 고자국 등이었다. 여기서 고자국은 소가야의 전신국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들은 변한국가들의 내부 변화와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포상팔국 전쟁은 국제전이며 한반도 남부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이였다.
이러한 국제전이 일어날 정도로 그당시 한반도 남부 사회나 정치체가 충분히 발달했다고 할 수 있다.

포상팔국 전쟁이 발생한 시기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거의 4세기를 전후하는 시점으로 이해하는데, 3세기 후반~4세기 초, 3세기 말, 4세기 전반 등으로 본다. 여기선 중립적인 3세기 말~4세기 초 정도로 볼 것이다.
비록 원치 않았겠지만 아라가야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신라에 원병을 청하지 않고 비굴하게 포상팔국의 일원이 될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상당한 물자를 들여 보복전을 벌이고 응징했다. 전쟁 이후 보라국 등 소국들은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여파로 세력이 약해져 멸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포상팔국의 난은 왜 일어났을까?
또 원한에 의한 보복심도 있었겠지만 아라가야는 이 전쟁이 국제전으로 번지는걸 막을 수 없을 만큼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을까?
그것은 해상무역의 독점적인 지위였다.
포상팔국은 나날히 커지는 아라가야가 자신들의 무역을 축소시키고 장악할것이 두려웠고 그래서 아라가야를 공격한것이다. 남강과 같은 아라가야의 유리한 지리적 위치를 강탈하지 않고 떠난것도 이를 뒷받침 해준다.
결국 포상팔국의 난은 중국-왜-낙랑-가야를 잇는 해상무역 중계권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었으며 각국의 번영과 생존권이 직결되는 문제였다.
아라가야를 견제하고 무역을 제한하며 아라가야의 경제성장을 방해해 포상팔국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인 것이다. 그렇기에 아라가야 또한 경제성장과 번영을 막을 포상팔국에 대해 사활을 걸며 응전했다.해상무역의 교역권을 결코 포기할 수 없던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 가야는 신라보다 무역에 우위였으며 동아시아를 넘어 아라비아까지 이어진 해상 무역 네트워크(해상 실크로드)를 구성했기에 더더욱 필수적이였을 것이다.
전쟁 이후 학계에서는 가야의 무역중심이 사물국의 늑도(사천) 교역에서 김해 교역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포상팔국의 난으로 변혁을 꾀했던 사물국의 늑도교역지는 김해교역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끝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기록의 가야가 금관가야인지 아라가야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여기선 가라국을 아라가야로 보는 남재우의 관점을 따르고자 하며, 그렇게 3세기 말 포상팔국 전쟁에서 승리한 아라가야는 주변 경쟁국을 제거하고 약화시켜 해안까지 진출하며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4세기 즈음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큰 이유는 포상팔국 전쟁의 승리로 얻은 해안진출이였다.이때부터 분국이 이뤄진게 아닌가 싶다.
5세기 경, 아라가야는 급격히 금관가야국에 못지않은 국력을 가지게 되며 독자적 지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00년 고구려의 남정은 가야정세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10년 경자(庚)子에 교서로써 보기(步騎) 5만을 보내어 신라(新羅)를 구하게 하였는데 남거성(男居城)을 따라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왜(倭)가 그 중에 가득했으나 관군(官軍)이 이르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왜(倭)의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즉시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成兵)이 신□성, 염성을 공략하니 왜구가 크게 무너지고 성안의 십중의 구가 왜에 따르는 것을 거부하니, 안라인수병이 ...을 잡아서 … 나머지 왜가 역시 안라인수병에 따랐다.(광개토태왕 비문)
위의 기사에서 알수 있듯 고구려군은 남거성부터 신라성까지 꽉 찼던 왜군을 격파해 가며 왜군을 쫓아 배후의 금관가야를 공격했으며 금관가야의 종발성을 항복시켰다. 문자의 탈락이 심해서 자세한 내막과 전투활동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백제,가야,왜 연합과 고구려,신라연합의 구도로 이뤄진 국제전에서 아라가야에 관한 언급이 보인다.
‘고구려 남정기사’는 광개토태왕은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한 왜를 쫓아냈다는 내용이다. 이중 ‘안라인수병’의 문구를 두고 갖가지 해석이 등장했다. 그중에는 ‘안(安)’을 술어로 해석해서 ‘신라(羅) 병사를 안치(安)했다(배치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혹은 ‘라(羅)’를 순라 혹은 순찰을 의미하는 ‘라(邏)’자의 동의어로 보아 ‘고구려의 순라병을 배치한 것’이라는 풀이도 있다.
그러나 ‘안라’를 고유명사로 보아 그냥 ‘안라국(아라가야) 별동대’ 혹은 ‘안라국 수비대’로 해석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았다. 예를 들어 북한의 학자 조희승은 ' 안라인수병..'이 여러 군데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군이 아라가야의 변방군과 여러 차례 격전을 치렀을 것이며 아라가야 수비군의 반격으로 일시적으로 신라성까지 타고 앉는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의 윤청우 박사는 당시 가야와 백제의 영향력에도 아라가야는 고구려 연합에 합류하는 외교적 모험을 했다고 주장했다.위의 광개토태왕릉비 자료가 그러한 관점에서 해석된 내용이다.그 내용에서도 볼 수 있듯 아라가야가 금관가야(임나)를 공격하여 함락시켜 아라가야에 따르도록 하고 끝내 왜까지 회유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으나 왜군이 크게 무너졌고 격퇴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당시 고구려의 개마무사과 비슷한 첨단 무기무장이 전쟁이후 보이는것을 보면 기술의 전파가 이루어진것도 시사해 볼 만하다.

고구려의 남정은 아라가야에 어떤영향을 미쳤을까?
당시 고구려남정의 주목적은 고구려가 백제를 견제,제압하는 것이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한강 진출을 둘러싸고 일진일퇴하며 ‘30년 전쟁’을 벌였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의 위협 속에서 가야-왜를 잇는 3국 동맹 축을 만들어 활로를 모색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의 무력은 압도적이었고 전쟁의 승자는 고구려, 패자는 뜻밖에도 금관가야였다. 이를 계기로 금관가야 주도의 전기가야연맹은 해체되고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며 금관가야에 가려진 두 강대국인 아라가야와 대가야가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하는 밑받침이 되었다.
이후 장수왕의 남진에 대적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가야는 대 고구려 동맹을 맺었으며 거의 40년간 이어졌다.
대가야가 주도하는 후기가야연맹에 접어들게 된다.
그동안은 대가야가 후기가야연맹을 주도했으며 다른 가야는 별 볼일 없는 구성원이라고 치부되었다.
하지만 고고학적 자료들과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아라가야는 전기가야연맹의 양대세력이었으며 후기에는 대가야를 견제하는 남서부 중심세력이였을 것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마디로, 전기연맹에서도, 후기연맹에서도 줄곧 2인자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가야연맹이라는 개념보다는, 때에 따라 유연한 외교를 하는 독자적인 국가라고 보아야한다. 이는 다른 가야도 상황이 비슷했다.대가야는 굉장한 성장세로 팽창했고 소가야는 남해안 무역에 치중했다.
그동안 아라가야는 뭘 했을까?
5세기 중엽, 고고학적 사료는 예사롭지 않다. 고고학적으로 합천,의령,진주,창원 등 아라가야풍 토기가 자주 출현했으며 신라나 백제에도 수출되었다. 대형 목곽묘가 축조되었고 이 가운데 수장층을 중심으로 수혈식석곽묘가 도입되어 5세기 말에 전 계층으로 확산되었다.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아마 지배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축조공법을 받아들이며 무역을 활성화한것 같다. 하지만 고고학 자료는 둘째 치더라도 이시기에 관한 문헌상 언급이 적다.
상당한 공백이 있는 상태에서 중국 역사서 남제서(南齊書) 479년의 기록에서 가야가 나온다.
가라국(加羅國)은 삼한(三韓)의 한 종족이다. 건원 원년, 국왕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렸다.
" 널리 혜아려 비로소 올라오니, 멀리 있는 이 (夷)가 두루 덕(德)에 감화됨이라. 가라왕(加羅王) 하지(荷知)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보국장군(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의 벼슬을 제수함이 합당하다."
「남제서」 권 58. 열전 제 39 만동남이전
여기 <남제서> ‘동남이 열전·가라’ 479년조를 보면
“가라왕 하지가 남제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자 ‘보국장군본국왕’에 제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동안은 이때 남제의 작위를 받은 ‘가라왕 하지=대가야왕’이라는 해석이 통설로 여겨졌는데
이는 대가야읍 출토 명문토기에 새겨진 "대왕" 칭호와 일본서기에 기술된 안라와 가라에선 왕이란 칭호를 썼다는 내용때문이다.
그러나 479년, 바로 그 무렵에 중국에서 제작된 청자가 함안에서 출토되자 새로운 해석이 나왔다.
바로 <남제서>의 ‘가라왕 하지’는 대가야왕이 아니라 아라가야 왕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마냥 허황되지만도 않는다.
만약 이에 기초한다면, 외교-정치적으로 스스로 왕이라고 칭할만큼 강력한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것을 보여준다.
5세기의 문헌공백기동안 아라가야는 체제를 정비했으며 기술,문화가 발전하고 활발한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다고 할수 있다.
6세기 경, 가야의 처지는 꽤나 암울했다. 위로는 고구려를 막기 위해 신라-백제가 동맹을 맺었고 다른 가야국들은 서로를 견제했다. 왜도 명목상 연합에 참여했지만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고공성장을 하던 신라가 정복의 칼을 쓸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금관가야는 힘을 다했고 대가야와 아라가야가 1인자 자리를 두고 끊임없이 경쟁했다. 또한 비화가야, 약화된 금관가야 또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다양한 세력이 난립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가야연맹을 이끌 구심점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신라의 야욕이 실행되기 시작했고 이는 계획된 수 였다.백제는 고구려를 막기위해 신라와 손잡고 있었고 왜는 빠르고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었다.이 틈을 타 빠르게 철의 요람인 가야를 정복하고자 한것이다.
가야국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그중 강한 세력인 아라가야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다.
이는 문헌에서도 나타난다.
이 달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을 안라(安羅)에 사신으로 보내어 명령을 내려 신라에게 남가라(南加羅)와 탁기탄(喙己吞)을 다시 세우도록 권하게 하였다. 백제는 장군 목윤귀(君尹貴)와 목례마나(麻那甲背)·마로(麻鹵) 등을 보내어 안라(安羅)에 가서 조칙을 받게 했다. 신라는 번국의 관가(官家)를 없앤 것이 두려워서 대인(大人)을 보내지 않고 부지내마레(夫智奈麻禮)와 해내마례(奚奈麻禮) 등을 보내어 안라(安羅)에 가서 조칙을 듣게 했다. 이에 안라(安羅)는 새로이 높은 당(호)을 세워서 칙사(勅使)를 오르게 하고 국주(國主)는 그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국내의 대인(大人)으로서 당(호)에 올랐던 사람은 한둘 정도였다. 백제의 사신 장군 윤(君) 등은 당(堂) 아래에 있었는데 몇 달간 여러 번 당 위에 오르고자 하였다. 장군 윤(君) 등은 뜰에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일본서기」 권 17 男大迹天皇 細體天皇 529년 3월조
위의 기사를 보면 529년 남부의 여러 세력이 안라(아라가야)를 중심으로 자구책을 모색하고, 이에 안라가 백제·신라·왜의 사신을 초빙하여 새롭게 조성한 고당(高堂)에서 국제회의를 주도한다.
이른바 '안라 고당회의(高堂會議)'였다.
신라가 먼저 탁기탄(경남 밀양)을 멸망시키는 등 시작된 신라의 남부 정복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회의 개최 목적은 양국의 세력을 미리 차단하는 것. 회의 참석자는 안라 국주(아라가야 왕)와 대인(大人), 신라 사신 2명, 왜 사신 1명이었다. 새로 만든 높은 당(고당) 위에서 회의가 진행됐다. 백제 또한 장수 3명을 파견했으나 박대당하며 내쫓겼고 신라는 고위직을 파견하지 않는 등 순조롭지 않았지만 아라가야가 이 회담을 통해 가야를 이끄는 대국임을 드러내는 외교적 성과 또한 있었다.
그러나 이 국제회의는 실패로 끝났다.신라는 애초에 따를 마음이 없어서 내마로 추정되는 11번째 하급관료를 보냈고 백제도 악감정이 있던것인지 아라가야가 차별했다.안그래도 도울 가능성이 낮은데 기회마저 사라졌다.왜 또한 신라를 이기기 버겁고 관여하기 어려웠다.결정적으로 신라는 곧바로 추가적인 군사행동을 보이며 회의는 실패로 결정되었다.
비록 이 국제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안라(아라가야)가 가야국가와 주변의 제국들이 인정하고 당대의 국제정세를 주도한 유력한 나라였음을 암시해 준다. 아라가야는 후기가야 연맹의 맹주이자 고대 한국의 강소국인 셈이다.
아라가야는 다른 가야국들을 끌어모아 대 신라 항쟁을 준비하려 했다.<일본서기> ‘흠명기(544년)에서
“임나는 안라를 형(兄) 혹은 아버지(父)로 여겨 오로지 안라의 뜻을 따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야의 여러 나라가 안라(아라가야)를 형님으로 모신다는 말이다.
그 당시 가야국들은 아라가야가 강하다는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가야의 존명을 건 최후의 전쟁을 준비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수 없으나 일본서기에는 탁순국이 정복되었다고 한다. 이제 모든 완충국이 사라지며 아라가야는 신라와 경계를 맞대며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라가야의 멸망은 급조된 연맹의 구심점이자 가장 강한 연맹국의 소멸이였다. 신라의 입장에선 아라가야를 정복하면 나머지는 시간문제였다.
처음엔 아라가야의 국력이 강성하여 직접적인 침탈을 하는 군사행동을 자제했었다.
그러나 아라가야는 이를 마지막으로 6세기 중엽 신라에 의해 홀현히 통합되고 말았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아라가야는 끝내 나라를 유지하지 못했다.
{삼국사기}(권 34 지리지 함안군)에는'법흥왕이 많은 병력으로서 아시랑국(아라가야)을 멸망시켜 그 땅을 고을로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대동지지」에 이르길 법흥왕 24년(537년)에 아라가야가 멸망했다고 전한다.
금관가야는 524년 법흥왕 때 항복해서 나라가 망했고 좀 더 서쪽에 있는 아라가야는 마지막 기록을 토대로 537년 혹은 법흥왕 제위기 540년까지, 이 시기 사이에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 결국 격변하는 정세 속 아라가야는 6세기 중엽에 이르러 장장 600년의 역사에 마침표를 고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문헌상의 역사이다.
좀더 많은 기록이 일본서기 등 일본 고서적에 담겨있으나 제외했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의 안라국의 멸망연도가 561년으로 아라가야가 멸망하고도 계속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할수 있는 대안은 '가야분국론'이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룰것이다.
제외한 일본서기의 내용에는 541년부터 안라국이 안라왜신관(주안라 일본 대사관)과 공모하여 신라와 통교하거나 고구려에게 백제를 공격해달라 주선한 내용과 이에 분개하여 일본과 안라국에 따지는 백제의 모습까지 기술되어 있다.
6세기의 아라가야의 역사와 안라고당회의 또한 일본서기에 기초했으나 6세기의 기록이 없어 어쩔수 없이 서술했다. 이에 대해선 양해해주길 바란다.
결국 일본서기의 아라가야 역사는 일본내 아라가야의 분국인 안라국에서 일어났을 일로 바라보는것이 타당하다.
현재 학계도 일본서기의 안라국을 아라가야와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연구의 진척이 늦어서 규명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 새로운 발견과 사료간의 상호증명이 바뀌며 역사는 달라질수 있다.
그때마다 발빠르게 수정을 할 계획이다.
아라가야의 역사나 건축,예술의 변천이나 문화 등은 인터넷에 정보가 부족하며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도 않았기에 이점이 안타까워 제작하게 되었다. 앞으로 건축,공예,제철,예술과 문화등 많은 요소를 다룰것이다.
얼마나 길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전문적인 글이라기보단 아라가야의 자료를 찾는데 수고로움을 덜어줄 자료집 정도로 생각해주면 감사할것이다.
이상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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