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와 고조선의 건국설화 차이
단군신화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널리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환웅이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였다.
이가 환웅 천왕(桓雄天王)이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善惡)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에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체를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곰은 그것을 먹으면서 기(忌)한 지 삼칠일(三七日: 21일) 만에 여자의 몸으로 변하였으나,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않아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단수(壇樹)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였다. 그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하였다.
당(唐)의 고(高)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년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 1, 기이 편 고조선(古朝鮮) 조
동명신화
북이 탁리국의 시비가 임신을 해서 왕이 죽이려고 하자 시비가 대답하기를 "닭의 알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게 내려와서 임신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나중에 아들을 낳아서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다.후에 마구간에 넣어 말로 하여금 아이를 죽이려 했지만 말이 다시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다.
왕은 하늘의 아들로 의심해서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 그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는 소,말을 기르게 명했다.동명이 활을 잘 쐈으므로 왕은 그가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 죽이려 했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의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서 다리를 만들어 동명은 건너갔는데,물고기와 자라들이 흩어져서 추적하던 병사들은 건너지 못했다.동명이 이에 도읍하여 부여왕이 되었는데,
이것이 북이에 부여국이 있게 된 이유다.
동명의 어머니는 처음 임신했을 때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낳았는데, 버려졌을 때 돼지와 말이 기운을 불어 살아났고, 장대해지자 왕이 죽이려 했으나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으니 천명이 마땅히 죽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돼지와 말이 생명을 구해주었고,마땅히 부여를 도읍으로 삼았으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논형> 2권 《길험》 편
동명은 주몽이였는가?
부여의 건국시기는 위만조선 이전이다.
<부여>라는 명칭이 문헌 상에 나타난 가장 이른 기록은 <사기> 129권 <화식 열전 오씨라> 조에 있다.
내용을 보자면
무릇 연燕은 ···북쪽으 로는 오환, 부여와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예맥, 조선, 진반과 이익이 얽혀 있다.
(夫燕 北隣烏桓, 夫餘,東綰濊貊, 朝鮮,眞番之利)>
라고 씌여 있다.
부여의 명칭이 조선, 진반이란 명칭과 동시에 기록되고 있는 사실로써 미루어 보아 이 기록은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하기 전의 사실로 인정된다. 왜냐하면 이 진반은 진반군이 아니라 조선과 병칭된 <진번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한사군 설치 직전 <사기> 조선열전에는 “팽오가 예맥,조선과 개통하고 창해군을 설치했다.’라고 했는데 진반이란 명칭이 쓰이지 않았으며 또한 진번국은 같은 <사기> 조선열전의 위만의 기사에 “진번(真畨),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고 사방이 수천리였다.”라는 기록을 통해 위만이 집권한 이후 진번국은 병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진번과 동시기에 존재한 부여는 적어도 위만 조선 이전에 존재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부여,그 이전의 국가 <불여지국>
그럼 위만 조선 이전에 부여는 어떻게 존재했는가?
<산해경>山海經 17권 <대황북경>大荒北經에는 <호불여지국이 있다(有胡不與之國)>라고 썼는데,
곽박은 이를 주석하여
<일국은 다시 이耳라고 불리는데, 지금 호와 이는 말이 서로 통한다( 國復名耳, 今胡夷 語皆通然)>
라고 썼다.
이 주석의 뜻은 부여는 <불여>라고도 칭하는데, <부여>夫餘와 <불여>不與는 호(즉 부여)와 이(고조선, 진국 등)의 말로 는 통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리지린 박사는 서술했다.앞선 기록에서도 부여는 고리국,흉노와 함께 북이로 불리고 예맥,조선은 동이로 지칭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불여지국>(不與之國)은 곧 <부여>와 동일한 국명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러면 이<불여지국>은 어느 나라인가?
그래도 부여 건국 이전에 고조선 외에 또다른 <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삼국지>부여전에 “부여는 본래 예의 땅이다”라고 했고 조선상고사에 이르기를 <예>는 한음으로 <후이>며, <부여>는 <부위>이니 양자는 한음으로서는 동일한 명칭이라 했다.
그리고 <불여국>不與國이라고 쓰지 않고 <불여지국>不與之國이라고 쓴 것을 보면 불여지국은 예지국이라고도 해석된다.
따라서 불여지국은 본래 예국이며 고리국에서 동명이 남하하기 이전의 선 국가이자 예인의 나라라고 불리던 고조선의 일부지역이라 할 수 있다.
부여의 건국연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동명이 남하하기 전에도 부여와 같은 불여지국이 있었으며 고조선의 일부 지역이였다.
혹여나 불여지국이 오환과 선비일수도 있지만 산해경은 기원전3세기 이전에 오랜 기간을 두고 편찬된 책으로 오환이나 선비가 존재할 시기가 아니기에 불여지국이 다른 국가일리는 희박하다.
만약 산해경이 가장 늦은 기원전 3세기말인 한 왕조 시기에 편찬되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늦춰 잡아도 불여지국은 3세기 중반에는 존재해야 한다.그러므로 부여 자체의 건국연도는 최소 3세기 중반,그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부여는 문헌기록이 말해주는 것과 같이 동명이 예인의 불여지국(부여)에 가서 건국한 국가이지만 그것은 위만이 정권을 탈취해도 조선을 유지한 것처럼 통치자의 교체일 뿐 부여의 교체가 아니다.
단군 계승 인식의 진실
그렇다면 언제 부여가 단군을 계승했다는 인식이 나왔을까?
이러한 인식은 삼국유사,제왕운기에 처음 나타나는데 부여왕인 해부루가 단군의 아들이니 해부루의 아들인 금와가 동부여를 세우고 주몽이 동부여에서 나와 고구려를 세우고 온조가 백제를 세우니 단군에 근본을 둔다는 인식이 지속되고 있다.
즉 부여의 고조선 계승의식은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떄 생겨났으며 요,금,몽골 등의 침입이 잦았을 고려후기 때 민족의식을 깨우치고자 다른 계통인 고조선과 부여를 하나의 계통으로 묶은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부여와 고조선은 같은 계통적으로 하나의 집단이라 보긴 힘들다.또한 예맥,조선은 동이라 불린 반면 부여와 고리국은 북이라 불렸으며 천손강림신화와 북방의 감응신화의 차이를 통해서도 문화적 차이를 볼 수 있다.
다만 둘 다 오랑캐 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점에서 범 동이계에 포함된다고도 할 수 있고 <사기> 조선열전에 위만이 고조선으로 넘어오기 위해 상투를 틀었다는 기록과 길림성에서 출토된 부여 금동가면이 상투를 틀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다.
부여의 사료는 아직 불완전하고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또한 많은 시각이 있으므로 이 글은 그저 다양한 시각중에 하나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