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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의 서사시 : 다라국의 신기루

운사(云史) 2024. 5. 27. 15:43


합천 다라국은 독립국이 아닌 대가야의 지방정권이다.

(합천지역을 독립국가로 보지 않는 이유)


합천 옥전 고분군


가야사를 서술함에 있어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이 있다.

바로 합천의 여러 고분군을 비롯한 합천의 지역은 현재 학계가 주장하기를 또다른 가야인 다라국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합천의 유물들을 비롯한 내용들은 다라국의 유산으로 서술해야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말이 꼭 틀린것은 아니지만 이 주장에는 많은 모순이 있다.다라국이 독립국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녕계,아라가야계와 대다수인 대가야계통이 있지만 합천의 일부 유물중에 아라가야계로 보일 경우에 자료로서 서술했을 뿐이다.


다라국은 왜 독립국가가 아닌가?


이것은 순전히 주관적인 생각이며 얼마든지 반박해도 문제가 없다.

현재 학계에선 "합천에선 다라국이 존재했고 4~6세기 까지 존속한것으로 보이는 유물들과 기록들이 등장한다.일본서기에 따르면 다라국은 아라가야에 외교관도 파견했고 양 무제시기 각국의 사절단을 그린 양직공도에도 다라국이 언급되었다.
고고학적 증거 또한 독자적인 토기와 왕릉에 버금가는 고총고분 등 타지역과는 다르다.

이로서 다라국은 실존했으며 독립적인 국가라는것이 명백하다"고 주장하며 합천의 가야정치체를 다라국이라고 마케팅을 한다.그러나 이는 관광적인 효과를 부르려고 하는것에 불과하다.어째서 독립국이 아니며 불가능한지 차례로 서술해보고자 한다.






1.시기적 열위


나로서는 다라국이 주변국에 예속되기 취약한 국가였다고 생각한다.「삼국지 위지」의 변한편에도 12개 소국이 있고 별도로 소도가 있다고 했다.소도가 있다는 것은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않은 군장사회이기에 이때 국가들은 국가라고 부르지는 못하던 시절이다.

이후에 대표세력인 구야국과 안야국이 포함되는 다섯 소국이 중심이 되어 성장을 하기 시작했고 특히 강성했던 아라가야,금관가야,대가야는 지속적으로 문헌기록에 나온다.

이때 다른 가야국들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했을 가능성이 없었을까?


교역에 필수적인 항로를 얻어야하는데 황강수계,남강수계,섬진강이나 낙동강수계 등 이미 가야국가들이 교역을 위한 항로를 점거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내륙 깊숙히 황강유역에 새로생긴 신흥국가라면 항구도 얻지도 못했을텐데 대가야,아라가야,소가야등의 쟁쟁한 가야강국들 사이에서 독립을 이뤘다? 납득하기 어렵다.오히려 주변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고 좌우로 휘둘리는 약한소국이 더 현실적이지 않은가?


다라국은 4~6세기에 있던것으로 추정되는만큼 건국시기가 다른가야에 비해 느리다.
그 시기에 아라가야는 포상팔국의 난에 승리했고
변한의 작은 소국들도 이후 기록을 전하지 않고 있는것을 보아 초기에 성장했던 가야들이 차례로 정복활동을 했을것으로 보인다.그시기에 다라국이 갑자기 등장해서 독립국이 되었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2.건국의 주체


원래 합천 지역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지만 정치집단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기 400년 전후 합천 옥전지역에 무기와 마구,고급 장신구 등을 가진 나라가 갑자기 등장했다.이 금속제품들의 원류는 고구려지만 토기와 묘제의 모습을 보면 가야 지역에 이미 정착한 문화가 이 지역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다라국은 4세기까지 미약한 집단을 유지하다가 이후 갑자기 뛰어난 철기를 제작하는 국가로서의 면모가 보인다.분명 문화의 유입이 있었다.


그렇다면 갑자기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이웃 간의 문화전파가 아니라 주민의 직접 이동에 따른 유입일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고분의 규모와 부장물 성격으로 보아 강력한 정치집단임을 알 수 있다. 다라국의 성립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의 대규모 군사행동은 고구려 문화의 전파와 함께 신라와 가야국가들에게 정치적 사회적 충격을 초래했다.이 혼란의 와중에 주변 주요 가야 지역 지배계층 일부가 옥전으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다라국의 역사는 시작됐다고 보는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다라국은 다른 가야국의 이민자들로 구성되었으며 건국과 동시에 주변의 대가야와 아라가야의 영향권에 벗어나는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크다.게다가 4세기후반 부장품으로 창녕(비화가야)계, 아라가야계, 대가야계 토기가 출토되는것을 보아 건국초기 다양한 가야주민아 이주했으며 독자성없이 주변 지역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이민자로 구성된 만큼 원주민과의 통합이 질되었을지도 미지수다.





3.양직공도의 모순


학계에선 다라국이 양직공도에 기록될만큼 외교적으로 독자적인 국가라는 주장한다.그러나 반박하자면 양직공도가 만들어지던 당시는 6세기 초로 장수왕의 남진으로 신라-백제-대가야-아라가야가 연합하여 100년간 막아내며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다라국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을것이다.또 양직공도의 백제는 신라를 자신의 속국이라 소개했고 주목적이 외교적인 영향력 행사였기 때문에 다라국을 포함한 그 주변의 국가들을 그저 속국으로 소개하기위해 외교관을 데려갔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는 실제로 번역이 안되서 백제사신에 기대고 왔고 양나라는 신라를 스스로 조빙할 수 없는 국가라고 기록했다.다라국은 대가야의 권역 아래 놓여져 있었기에 말할것도 없었을 것이다.또한 다라라는 국명과 지명이 무조건 합천 다라국을 시사할 수 없다.양직공도를 통해 독자적인 외교를 주장하기엔 무리가 있다.


상기문,기문국 또한 왜곡이 많은 국가로 오른쪽 위에 "다라"가 보인다.


게다가 「구당서」 백제전에 이르기를,


"서로는 월주(양쭈강 연안)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른다"
「구당서」[백제전]


라고 기술하고 있기에 백제가 일본과 월주를 점거하고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그렇기에 한반도에만 굳이 다라국을 비정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4.지리적인 한계


또한 다라국은 해외와 교류하기 위해 강을 통해 바다로 가는 항로를 이용했어야 했는데 주변에 유일한 강은 주변엔 황강 하류가 낙동강으로 나가 낙동강을 통해 바다로 나가는 길이 전부였다.옥전고분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황강은 율곡면과 쌍책면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가,상포나루에서 동쪽으로 돌아 성산리와 다라리를 지나고,적포에서 낙동강과 합쳐지는 구조이다.


경상도 지역의 강줄기,합천에서 무역을 위해선 아라가야의 통제가 불가피했다.



그런데 이런 유일한 무역로가 아라가야에 의해 전부 막힌다.함안은 낙동강과 남강의 사이에 있었고 그 당시 영역은 함안뿐만 아니라 의령,창원등 남강과 진동만,낙동강 하류를 차지하고 있었다.전략적으로 언제든지 다라국의 무역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다라국은 발전을 위해서라면 무역이 필수인데 백제,신라등 영토를 맞댄국가들과 육지의 소규모 거래에 한정될수밖에 없었다.발전이 힘든것이다.유일한 해결책은 아라가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것인데 과연 그랬을까?6세기에 일본서기에서 다른가야들이 아라국을 형 또는 아버지로 여겼다는 것을 보면 아닐것이다.

또한 5세기전후에도 대가야가 성장했는데 대가야도 섬진강,황강 루트를 차단할수 있었고 고성 소가야도 사천만과 고성만를 지녔다.아라가야 뿐만 아니라 소가야,대가야의 눈치를 봐야했고 대가야는 6세기에 이르러 하동지역과 여수반도,섬진강과 남강상류를 점유하며 남해안의 패권을 장악했다.무역로는 사실상 외국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경제적으로는 의존적일 수 밖에 없는 처지이고 이는 독립성을 크게 떨어트린다.그런데 무역을 한 흔적은 보인다.그렇다는것은 경제적인 의존이거나 다른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남조와 교류하기 위해 제작한 공예품.해상무역이 이뤄진것은 분명하다.





5.대가야 지배층의 존재


대가야는 처음부터 합천에 들어온 지배층을 구성했었다.
4세기 유물에 대가야계 토기가 나타나더니 5세기엔 아예 옥전고분군의 무덤이 대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확인되고 부장품 또한 금귀걸이,철제 무기등이 대가야 양식이였다.

5세기 후반 대가야는 북쪽 금강로, 서쪽 영산강로와 남쪽 남해안의 해상교통을 장악함으로써 교역에서 금관가야뿐만 아니라 신라와의 경쟁에서도 우위에 섰다.
이때부터 남강 상류에 대가야문물이 출현하고 토기,철기등이 합천에 출토되었다.
479년 대가야에 의한 남제로의 독자적인 견사(遺使)는 이와 같은 남해안의 해상활동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이는 451년 대가야인 가라加羅가 「송서宋書」 왜국전에 돌연 등장하는 시점과 부합한다. 대가야는 광양,여수,하동,순천,남원을 확보하고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백제와 왜의 교통뿐만 아니라 왜의 중국 교통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대가야가 교역에서 신라·백제와의 경쟁에서도 우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5세기 후반 일본열도에 이전 시기 이입되던 화려한 신라산 문물을 대신하여 금제 장신구와 금동제 마구, 토기를 비롯한 대가야산 문물이 집중 유입되고 백제산 문물이 이입되지 않는 것은 이를 웅변하는 것이다.

이 시기 5세기 중엽 일본열도의 대가야 문물은 섬진강수계의 호남 동부지역이 대가야권역에 포함된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5세기 후반 고령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가야권은 황강수계, 남강수계, 여수반도, 섬진강수계를 넘어서 고령에서부터 장수,남원,순천,광양,하동,합천,의령 등 남해안 일대에 걸치는 가야사상의 최대 판도를 형성하였다.

이는 당시 금강수계와 영산강수계를 포함하는 백제의 영역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면적이라 할 수 있다.

대가야권역은 토기의 생산과 유통으로 볼 때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동일한 경제권역이며 또한 수장묘의 묘제와 위신재의 분포로 볼 때 이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역으로 보인다.과연 고고학적 자료만 합천이 대가야영역인 것을 증명할까?그건 문헌상에도 나타난다.





6.대가야의 지방제도


문헌상에서도 대가야는 지방제도를 갖춘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게이타이 23년(529년)의 "가라왕(대가야왕)이 대사진帶沙津"

즉 하동지역을 대가야진으로 주장하는 것과 신라의 왕녀를 여러 현縣에 분산시켰다는 기사는 대가야에서의 영역 관념의 형성과 그 영역을 중앙과 지방으로 편제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하동을 포함한 임나사현의 광양, 순천, 여수 그리고 남원지역이 대가야영역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토기양식과 묘제가 일치하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특히 최근 확인된 하동군 홍룡리고분군의 고령지역산 토기와 이를 모방한 대가야양식 토기는 문헌사료와 부합하는 고고자료인 점에서 주목된다.

대가야권역은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배하는 직접 지배와 재지 수장층을 통하여 지배하는 간접 지배로 구분된다. 대부분의 지역은 간접 지배한 것으로 추정되나 5세기 말 이후 수장묘역이 돌연 이동하는 것에서 재지 수장조직이 해체된 것으로 추정되는 합천군 봉산지역과 수장묘가 현 저하지 않은 하동·여수·광양 등과 같은 전략적 요충지는 직접 지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외의 합천지역은 옥전고분군에 지배층 무덤이 보이듯이 수장층을 통해 간접지배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대가야의 노동력,군사 동원


대가야의 군사 동원과 관련하여 「일본서기」 게이타이8년(514년) 반파, 즉 대가야가 사졸과 무기를 모아 신라를 공격하고 또 대사강, 즉 섬진강 하구에서 군사를 일으켜 모노노베노무라지를 공격하였다는 기사와 「삼국사기」 진흥왕15년(553년) 대가야가 백제와 함께 관산성을 공격한 기사가 보인다.

이는 대가야가 대외 전쟁에 권역내의 병사와 무기를 징발하여 신라·왜와 교전할 수 있는 군사권을 확립한 것을 보여주며, 더욱이 대가야군의 작전범위가 금강수계, 낙동강수계, 섬진강 하구에 걸치는 광범위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대가야 왕권은 이와 같은 군사력과 토기, 위신재(권위와 신분 과시를 상징하는 유물)의 생산과 유통에서 추정되는 물자유통기구를 통해 그 권역 내각 지역의 수장층을 장악하고 편제한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초를 전후하여 고령분지, 합천지역 및 의령지역을 포함한 낙동강 중류역 서안에서 대가야식 산성이 연계하여 집중 조영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고령지역 내의 노동력 동원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볼 때 대가야가 그 권역 내의 백성을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 동원 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서기」에 보이는 대가야에 의한 대사지역 등의 산성 축조 기사도 노동력 동원 체제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다.그러므로 합천은 군사적으로 노동력이 동원되었으며 그 주체는 대가야이기에 독립국이라 볼 수 없다.





8.농기구 출토 부재


다라국은 무역을 통해서만 성장했고 농업국가는 아닌것으로 보인다.왜냐하면 농기구 부장품이 적고 고급 장신구와 공예품이 주로 만들어지는것을 보아 무역으로만 먹고살며 식량은 외부에서 조달했을것이다.그럼 위에서 말한 대가야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 맞을것이다.무역을 위한 유통로도 대가야가 운영하므로 이를통해 식량을 받고 군사적인 철기생산과 노동력을 제공했을 것이다.




9."다라"국명의 부재


다라라는 국명은 합천에서 발견되지 않았다.그럼에도 그저 지명중 다라리가 있어서 다라국이라고 주장하는 처지이다.하지만 일본규슈에는 다라라는 지명이 수십개가 있다.그렇다면 지명을 통해 다라국이라 주장하는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10.다라국은 임나일본부설의 임나 구성원


다라국은 임나10현에 포함되는 국가로 후에 일본에게 점령당하는 국가이다.다라국이 합천에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는 것이다.그러나 문헌기록에서 임나는 가야국과 멸망년도가 다르고 결정적으로 북쪽에 바다가 있다고 했다.

명백히 한반도가 아니다.그래서 일본내에서도 폐기된 이론이고 학계에서도 더이상 논의되지 않는다.
다라국은 일본내에서 존재했던 임나의 구성국가이지 합천이 아닌것이다.






결론적으로 합천은 고고학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대가야의 지방 정치체이다.그러니 합천 정치체라고 부르는것이 타당하다.또한 다라국은 별개의 국가로 합천에 존재하지 않았다.그럼에도 합천박물관은 다라국이 합천에 존재했고 독립적인 국가라며 아예 제7의 가야로 홍보하고 있다.게다가 대가야 유적은 부정할 수가 없으니 아예 연맹체이론을 꺼내들어 연맹체의 일원이였다고 한다.외교,경제,군사권을 뺏기고 대가야 문화유적만이 가득한 연맹원이 어디있는가? 어불성설이다.

최근엔 이에 반대하는 단체도 있고 가야 자료 총서에도 다라를 대가야의 속국 정도로 묘사하고 있지만 다라국을 임나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합천박물관의 다라문화실



역사에 정답은 없다.그러나 앞선 이유를 들어 합천은 대가야의 지방 정치체이고 다라국은 임나의 구성원인 별개의 국가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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